거대한 자연 바위벽에 새겨진 앉아 있는 모습의 석가여래불로 머리에서 어깨까지는 입체적으로 깊게 조각하였는데, 몸체로 내려올수록 얕은 선으로 조각한 특이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수법은 고려시대의 마애불(바위의 벽면에 새긴 불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조각기법이다.

둥글고 넓적한 얼굴에 반쯤 뜬 눈이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데, ··입의 표현이 뚜렷하고 균형이 잡혀 있다. 기다란 귀는 어깨에 까지 닿아 있고 목은 짧다.

불상의 몸은 두 어깨를 감싼 통견(스님들이 옷 입는 방법의 하나로 양쪽 어깨를 다 덮는 방법)의 옷차림으로 가슴 밑으로 둥근 U자형으로 깊게 파인 내의가 보이며, 그 밑으로 군의(허리에서부터 아래를 덮은 긴치마 모양의 옷)를 묶은 띠 매듭이 수평으로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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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 (三陵溪谷磨崖石迦如來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오른손은 위로 들어 가슴 부분에 놓고 왼손은 다리 위에 놓아 선정인(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 앉아 깊은 명상에 잠겨 있을 때 취한 손 모습)의 자세로 둥글게 모았다. 결가부좌(오른쪽 발을 왼쪽 허벅다리 위에, 왼쪽 발을 오른쪽 허벅다리 위에 놓고 앉는 자세로 부처님은 반드시 이렇게 앉음)한 다리에는 나선형의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발밑에는 올림연꽃으로 대좌를 이루고 있다. 거대한 자연석에 선으로 조각되어 있지만 당당한 모습에 위엄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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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불상 형식은 고려시대의 거대불상 표현으로 이어지는 토착적인 조각 전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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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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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부장 ibuzang

얼음골(냉골)이라고 부르는 삼릉계곡의 왼쪽 능선 위에 있는 이 석불좌상은 불상의 높이가 142cm이고 불상이 앉은 대좌의 높이는 96.7cm이다.

불상의 머리 위 정수리에는 큼직한 육계(상투 모양의 머리로 지혜를 뜻함)가 우뚝 솟아 있고 머리칼은 나발(소라껍질처럼 틀어 말린 모양의 머리칼, 곱슬머리)로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풍만하고 둥근 얼굴에 두 귀는 짧게 표현되었으며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부처님의 목에 있는 3개의 주름으로 지옥, 아귀, 축생을 제도할 수 있는 위력을 상징함)가 가늘게 새겨져 있다.

편단우견(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차림)의 옷주름선은 간결하게 표현되어 풍만한 몸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불상의 손 모습은 항마촉지인(왼손을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은 내리어 땅을 가리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손 모습으로 마귀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을 뜻함)하고 있으며, 허리는 가늘고 결가부좌로 앉은 자세는 당당하고 안정감이 있으며 동시에 부처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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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慶州 南山 三陵溪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666호)

불상의 뒤쪽에 세워 놓은 광배는 크게 파손되어 윗부분이 3분의 1 정도 없어진 상태로 불상 대좌 뒤쪽에 떨어져 있었으며, 얼굴은 코밑에서 턱까지 떨어져 나가 시멘트가 붙여져 있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2007년 봄에 시작된 정비작업을 통해 2008년에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고쳐 놓았다.

둥근 두광과 신광이 돌출 선으로 구분된 배 모양의 거신광배의 안쪽에는 연화문(연꽃 모양의 무늬)과 당초문(덩굴무늬)을 새겼고 그 주위에 화염문(타오르는 불꽃 모양의 무늬)을 둘렀다.

불상이 앉은 대좌는 상··하대로 구성되었는데, 상대에는 화려한 연꽃무늬를 조각하였으며, 8각 중대석의 각 면에는 간략하게 안상(코끼리 눈 모양)을 조각하였다. 하대는 단순한 8각 대석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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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하기 전 모습01 (얼굴에 시멘트를 발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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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하기 전 모습02 (깨어져 방치되어 있는 광배)

연꽃무늬와 안상이 조각된 8각의 대좌 위에 당당하고 안정된 자세로 앉아 있는 이 불상은 89세기에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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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부장 ibuzang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불상은 높이 10m가량 되는 바위 면에 가운데 선으로 새겨진 앉아 있는 모습의 여래상이다.

이 여래좌상의 몸은 모두 선으로 그은 듯이 새겨져 있는데 얼굴만 도드라지게 조각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여래상의 머리는 소발(민머리)이며 좁은 이마에 그려진 백호(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희고 빛나는 가는 터럭)는 가늘게 윤곽만 표현되었다. 양쪽 눈은 홈을 파 놓은 듯 간략하게 처리하였는데 눈초리는 추켜올려져 있다. 여래상 뒷면에는 부처님의 몸에서 비치는 빛을 표현한 광배를 가는 선으로 간단하게 처리하였다.

몸에 걸친 옷은 통견(양쪽 어깨에 걸치게 입는 옷)으로 옷자락이 몸을 따라 흘러내려 결가부좌한 다리 위로 내리뜨려져 있다. 옷 주름은 대체로 고른 간격의 계단형태에 가깝게 표현되었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두는 전법륜인( 부처가 처음 깨달음을 얻은 후 인도 바라나시의 녹야원에서 다섯 명의 비구와 중생들에게 최초로 설법할 때의 손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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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계곡선각여래좌상 (三陵溪谷線刻如來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9호)

몸 아래쪽에는 옷 주름 표현이 거의 없고, 연꽃잎의 윤곽만 새겨진 연화대좌가 불상 전체를 넓게 받쳐 주고 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에서 고려초기인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경주남산에서 유일한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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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부장 ibuzang

자연 암벽의 동서쪽 벽에 각각 세 분씩 선으로 새겨진 육존상이다. 그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우수하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선각 마애불(절벽의 바위 면에 양각(돋을새김), 음각(오목새김), 선각(선으로 새김) 등의 방법으로 새긴 불교의 조각상을 말한다) 중에서는 으뜸가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이 마애선각육존상은 만들어진 시대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체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고 있으며, 오른쪽 암벽의 정상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법당을 세웠던 흔적인 기둥 자리와 함께 빗물이 바위면 을 적시지 않게 물길을 돌렸던 홈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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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계곡선각육존불 (三陵溪谷線刻六尊佛)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

왼쪽 삼존상의 본존은 아미타여래상으로 양쪽의 보살상(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연꽃무늬 대좌 위에 무릎을 꿇고 본존불을 향해 연꽃을 공양하는 자세이다. 삼존상 모두 머리 뒤쪽에 둥근 두광(부처나 보살의 머리에서 나오는 빛)이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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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 삼존불

아미타여래상은 편단우견(왼쪽 어깨에 옷을 걸치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옷차림)으로 가사를 입고 있는데, 허리 밑에서 발 윗부분까지 U자형의 곡선을 그리며 늘어져 있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들어 올렸고 왼손은 배 앞으로 들어 양 손바닥을 마주하고 있다.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보살상은 모두 2개의 구슬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다. 어깨를 감싸고 양쪽 겨드랑이 밑으로 빠져나가는 천의(천인이나 선녀의 옷) 자락이 몸 옆으로 큰 곡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오른쪽 삼존상의 본존은 석가여래상으로 넓은 연꽃대좌 위에 앉아 있고, 그 좌우의 보살상(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온화한 표정으로 연꼿을 밟고 본존불을 지그시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니다. 보살상은 모두 머리 뒷쪽에 둥근 두광을 새겼으며 본존상에만 두광과 신광(부처나 보살의 몸에서 발하는 빛)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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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삼존불

본존상은 편단우견의 옷차림에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가슴 앞에 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배 앞에 들고 있다. 보살상은 구슬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으며, 오른손을 가슴 앞에 왼손은 손끝을 밑으로 하여 배 앞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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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부장 ibuzang

경주 남산의 삼릉계곡에 있는 이 불상(높이 1.5m)은 통일신라 시대의 작품으로,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 바위면 전체를 광배(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 한 것으로 머리에서 나오는 빛을 두광, 몸에서 나오는 빛을 표현한 것을 신광이라고 함)로 삼고, 연꽃무늬 대좌 위에 서 있는 관음보살(세상의 모든 불행과 고통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주고 세상을 구하는 보살, 관세음보살 또는 관자재보살이라고도 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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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 (三陵溪谷磨崖觀音菩薩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

이 불상의 머리에는 보관(보석으로 화려하게 꾸민 모자)을 쓰고 있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은 부처의 자비스러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들어서 가슴에 대고, 아래쪽으로 내린 왼손에는 보병(꽃병이나 물병을 아름답게 이르는 말로 정병이라고도 한다. 관음보살이 보통 들고 있는데 이 병에 들어 있는 물로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갈증을 해소해 준다고 함)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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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의 몸 아래쪽은 군의(허리에서부터 아래를 덮은 긴치마 모양의 옷)를 묶은 띠가 허리에서 무릎 바로 위까지 늘어져 있고, 양 다리에 각각 U자 모양의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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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부장 ibuzang

삼릉에서 개울을 따라 계곡으로 약 300m쯤 가면 길 옆 바위 위에 머리 없는 석불좌상이 앉아 있다이 불상의 높이는 1.6m이고 양 무릎 너비가 1.56m되는 큰 좌불이다.

이 불상은 1964년 등산객에 의해 발견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는데 원래의 위치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불상의 머리는 없어졌으나 목에는 삼도(악인이 죽어서 가는 세 가지의 괴로운 세계 즉 지옥도, 축생도, 아귀도이다)가 뚜렷하게 남아 있고, 매우 정교하게 조각된 법의(승려가 입는 가사나 장삼 따위의 옷)에는 옷을 묶는 매듭과 함께 옷주름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불상의 뒷면에도 옷자락이 표현되어 잇다.

무릎의 양쪽이 모두 떨어져 나가 불상의 수인(모든 불보살과 제천선신의 깨달음의 내용이나 활동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시로 가운데 또는 양쪽 손가락으로 나타내는 모양)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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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계곡석조석가여래좌상(三陵溪谷石造釋迦如來坐像)
(비지정문화재)

편안히 앉은 자세와 당당함이 넘치는 가슴과 넓은 어깨는 8세기 중엽 신라 전성기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불상의 띠 매듭은 용장사지 삼륜대좌불과 유사하며, 삼각형으로 마무리된 법의 끝자락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삼릉계 약사여래좌상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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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밀하게 조각된 옷 주름과 옷을 묶는 매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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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부장 ibuzang
경주시 배동 서남산 자락에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으로 아달라 이사금, 신덕왕, 경명왕 등 박씨 왕 세 분의 능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3기의 무덤은 모두 원형봉토분(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무덤)이다.
무덤 내부는 1953년과 1963년에 신덕왕릉이라 전해져 오는 가운데 무덤이 도굴 당했을 때,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으로 밝혀졌다. 이 무덤 내부의 벽면이 병풍을 돌려 세워 놓은 것처럼 동쪽과 서쪽벽 일부에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 등의 다섯가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고분벽화가 남아 있지 않은 신라의 무덤으로 매우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학자들 사이에는 다섯가지 색깔을 통해서는 오행설과 연관이 있으며, 색이 칠해진 12개의 벽면은 방위와 관련된 12지신 사상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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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배동 삼릉 (慶州 拜洞 三陵)
(사적 제2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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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 중 첫번째 무덤의 주인공인 신라 제8대 아달라 이사금(재위 154~184)은 일성 이사금의 큰 아들로 왕비는 지마 이사금의 딸인 박씨 내례부인이다. 왕은 키가 7자로 큰 편이며, 콧대가 우뚝한 독특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재위 3년(156)에 지금의 충북 충주시 상오면과 경북 문경시 가은읍 사이의 고갯길인 계립령 길을 열었으며, 재위 5년(158)에는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 사이의 길인 죽령을 열었다.
이 왕의 재위 기간 동안에 폭우, 서리, 우박, 지진, 유행병, 가뭄 등의 자연 재해가 많이 일어났다.
재위 12년(165)에는 아찬(신라 17관등 중 여섯번째, 아척간이라고도 함) 길선이 반역을 꾀하다 실패하여 백제로 달아나자 왕은 백제에 글을 보내 길선을 돌려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백제 제4대 개루왕(재위 128~166)이 거부하면서 신라와 백제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재위 14년(167)에는 백제 제5대 초고왕(재위 166~214)이 군사를 보내 신라 서쪽 변두리 2개의 성을 습격하여 백성 1,000여명을 사로잡아 갔다. 이에 왕은 일길찬(신라 17관등 중 일곱번째, 일길간이라고도 함) 흥선으로 하여금 2만명의 군사로 백제를 공격하게 하고, 스스로 기병 8천명을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이에 백제는 사로잡아 갔던 신라의 백성들을 모두 돌려 보냈다. 재위 31년 만에 왕이 죽었으나 왕릉의 위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삼릉의 가운데 무덤의 주인공인 신라 제53대 신덕왕(재위 912~917)은 아달라 이사금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대아찬(신라 17관등 중 다섯번째, 대아간이라고도 함) 예겸이며, 왕비는 헌강왕의 딸이다. 신라의 국력이 기울어 가는 후삼국의 혼란기에 왕위에 올라 후백제의 왕 견훤에게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이 공격 받기도 하였다. 재위 6년(917) 만에 왕이 죽자 시호를 "신덕(神德)"이라하고 죽성(위치 미상)에 장사 지냈다.

세번째 무덤의 주인공인 신라 제54대 경명왕(재위 917~924)은 앞선 신덕왕의 태자로 왕위에 올랐으나, 2년 뒤 일길찬(신라 17관등 중 일곱번째, 일길간이라고도 함) 현승이 반역을 일으키다 사형을 당하고, 920년에는 후백제 왕 견훤의 공격으로 대야성이 함락 당하였다. 이때부터 신라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고려 태조 왕건의 보호를 받는 처지가 되었으며, 지방의 많은 성들이 고려에 귀순하거나 항복하였다.
재위 8년(924)에 왕이 죽으니 시호를 "경명(景明)"이라하고 황복사 북쪽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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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부장 ibuzang

신라의 옛 수도였던 경주시의 남쪽을 둘러싸고 경주평야의 남북으로 솟아 오른 불교문화유적이 많기로 유명한 산이다. 경주평야의 주위에는 서쪽에 선도산, 동쪽에 낭산과 명활산, 북쪽에 금강산 등 많은 산들이 성벽처럼 둘러서 있는데 그 중에 남쪽으로 높게 솟은 산이 남산이다.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 두 봉우리 사이를 잇는 산들과 계곡 전체를 아울러 남산이라고 한다. 제일 높은 봉우리인 금오봉의 높이는 468m이고, 남북의 길이는 약 8, 동서의 너비는 약 4이다. 남산의 지세는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뉜다. 동남산 쪽은 가파르고 짧은 반면에, 서남산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긴 편이다.

동남산과 서남산에는 각각 16개의 계곡이 있고, 남쪽의 2개와 합하여 모두 34개의 계곡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유적의 숫자로 보면 서남산 쪽이 동남산보다 월등히 많은데, 이 계곡들에는 석탑·마애불·석불·절터 등이 널려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절터는 112곳이며, 탑은 61기이고, 불상은 80여체를 헤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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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산에서 바라본 경주 시가지 전경

61기를 헤아리는 석탑 중에는 높이가 7m 가량 되는 큰 것, 5~6m 되는 것, 3~4m 정도의 작은 것들이 있는데 그중 중간 것이 제일 많다. 평지에 세워진 절은 보통 법당 앞에 탑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남산에 세워졌던 절의 탑들은 법당의 위치와 상관없이 대개 보기 좋은 바위 봉우리 위에 세워졌다.

남산의 불상들을 살펴보면 입체로 된 것이 29체이고 바위 면에 새긴 마애불상이 51체이다. 큰 것은 10가량 되는 것도 있지만 보통 4~5m 되는 것이 많다. 또 작은 것은 1m 정도 되는 것도 있다. 부처골 감실여래좌상이나 배리삼존불, 장창골삼존불처럼 6세기말~7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도 있고, 삼국의 통일을 기원하여 조성한 탑골부처바위도 있으며, 통일된 나라의 영광을 위해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칠불암불상군도 있다.

그리고 왕정골 여래입상이나 삿갓골 여래입상처럼 우리 민족예술의 황금시대인 8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도 있다. 또 보리사 여래좌상처럼 화려하고 섬세하던 8세기말 내지 9세기 초반의 것도 있고, 9세기 중엽의 것들도 있어 수백 년 이어온 신라 불교미술의 흐름을 이곳에서 모두 볼 수 있다.

남산에 마애불상이 많은 것은 우리 조상들이 불교수입 이전부터 믿어온 바위신앙이 불교신앙과 합쳐진 우리 불교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바위 속에 신령스러운 힘이 있다고 믿어온 신라 사람들은 불교가 들어온 뒤 바위 속에 부처가 있다고 믿게 되어 많은 마애불상을 만들었다. 냉골 마애대좌불은 머리는 입체에 가까운 조각인데 비해 몸체는 바위 위에 선각으로 되어 있다. 몸체가 반 자연·반 인공으로 되어 불상이 바위 면에서 튀어나오지 않고 예배하는 사람의 마음을 바위 속으로 이끌어 부처의 영에 예배하도록 되어 있다. 냉골 석가여래삼존상이나 아미타여래삼존상(보통 선각육존불이라고 함)은 다듬지 않은 바위 면에 새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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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산 냉골 마애대좌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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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산 냉골 선각육존불

남산에는 신라 제26대 진평왕(579~632) 때 쌓은 남산신성이나 고허성 같은 국방시설의 터도 남아 있다. 남산신성 터 안에는 2곳의 무기 창고터와 1곳의 식량 창고터가 남아 있는데 식량 창고터의 길이는 100m이며, 지금도 비가 오면 탄화된 쌀알들이 발견된다. 무기창고도 길이 50m가 넘는 큰 건물이었는데 모두 밑으로 바람이 통하는 다락식 건물이었다.

또한 남산은 신라 사영지(청송산, 피전, 금강산) 가운데 한 곳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화백회의)을 갖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첫 왕인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 남산 기슭의 나정이며, 불교가 공인된 528(법흥왕 15) 이후 남산은 부처님이 항상 계시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높이 받들어져 왔다.

신라 제49대 헌강왕 때 남산의 산신이 나타나 나라가 멸망할 것을 미리 알려 주었다는 이야기가『삼국유사』전해져 온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한 어느 날,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 사람들은 보지 못하였으나 왕만이 홀로 이것을 보았다. 왕은 스스로 춤을 추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그 형상을 보였던 것이다. 산신은 나라가 장차 멸망할 줄 알았으므로 춤을 추어 그것을 경고했던 것이나,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날 조짐)가 나타났다고 하여 방탕한 생활이 더욱 심해졌던 까닭에 신라는 마침내 신라 55대 왕인 경애왕이 이곳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치욕을 당하고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나라를 바치면서 멸망하였다고 한다. 경주 남산은 신라 천년 역사의 시작을 함께하였으며, 신라의 마지막을 말없이 지켜본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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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부장 ibuz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