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원원사지(사적 제46호)에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이다. 원원사가 세워진 시기에 대해서는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권제5 신주 제6 명랑신인조에 그 내용이 전해져 오고 있다.

또 신라 서울 동남쪽 20여 리 되는 곳에 원원사(遠源寺)가 있는데, 세상에 이런 말이 전한다.
"안혜 등의 네 대덕(안혜, 낭융, 광학, 대연)이 김유신(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장군), 김의원(신라 중대의 귀족), 김술종(신라의 진골출신으로 진덕여왕 때 삭주도독을 지냄,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화랑 죽지랑의 아버지) 등과 함께 발원하여 세운 절이다. 네 대덕의 유골은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혀 있기 때문에 이름을 사령산 조사암이라고 한다."

위의 내용으로 볼 때 원원사는 7세기 중엽에 세워진 사찰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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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원원사지 동ㆍ서 삼층석탑(慶州 遠願寺址 東ㆍ西 三層石塔)
(보물 제14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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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원사지 동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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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원사지 서탑

원원사지 두 탑은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2층 기단의 네 면의 각 기둥 사이에 3구씩 전체 12구의 십이지신상(땅을 지키는 열두 신장으로 열두 방향을 가리키는 방위신이기도 하다. 호랑이·토끼·용·뱀·말·소·원숭이·닭·돼지·개·쥐·양 등 열두 마리 짐승으로 몸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이 조각되어 있다. 이들 십이지신상은 모두 연꽃무늬 대좌에 앉아 있는데, 평복의 옷차림에 옷자락이 하늘로 날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동탑의 동쪽면 십이지상 1구와 서탑의 남쪽면 십이지신상 2구는 없어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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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원사지 동탑 십이지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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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원사지 서탑 십이지신상

두 탑의 1층 몸돌의 네 면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사천왕상(동서남북에서 부처님의 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동쪽의 지국천왕, 서쪽의 광목천왕, 남쪽의 증장천왕, 북쪽의 다문천왕 등이다. 우리나라 사찰의 입구에 있는 천왕문 안에 보통 모셔져 있다)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 중 서탑 남면의 사천왕상 1구는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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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원사지 동탑 사천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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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원사지 서탑 사천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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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부장 ibuzang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토함산 자락에 있는 절터이다. 숭복사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두탑이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가람 형식이다.
양탑 모두 2층의 기단 위에 3층으로 이루어진 석탑으로 동탑은 2층 몸돌이 없어지고, 서탑은 2층과 3층 몸돌 및 3층 지붕돌이 없어졌다. 두 탑 모두 2층 기단면에 한쪽에 2구씩 전체 8구의 팔부신중(부처님의 법을 지키고 대중을 교화하는 하늘의 장수로 팔부중 또는 천룡팔부라고도 함)이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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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복사지삼층석탑 (崇福寺址三層石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4호)

특이한 점은 탑의 지붕돌 네 모서리 끝에 풍경(법당이나 불탑의 처마 또는 지붕 끝 부분에 매달아 소리를 나게 하는 작은 종)을 달았던 흔적인 구멍들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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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돌 모서리에 뚫려 있는 구멍(풍경을 달았던 흔적)

동탑 및 서탑 모두 1층 몸돌의 네 면에 문(門)모양이 새겨져 있다. 일반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 있어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본다.
숭복사터에 있었던 귀부(거북모양의 비석받침돌)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정원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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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복사지 동3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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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복사지 서3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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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복사지 귀부(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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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산사지삼층석탑(甘山寺址三層石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5호)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의 감산사 옛 절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이다. 2층의 기단 위에 세워진 탑 몸돌 가운데 2~3층은 없어졌다. 각 층의 지붕돌 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다.

감산사에 모셔져 있다가 1915년 서울로 옮겨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의 광배(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표현한 것)에 새겨진 글귀에 따르면 신라 제33대 성덕왕(재위 702~737) 18년(719) 2월 당시 중아찬(신라17관등 중 여섯번째) 김지성이 감산에 있는 자신의 토지를 내놓아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그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세웠던 사찰이 감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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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보물 제1758호 ‘포항 중성리 신라비’를 국보로 승격 예고하고, 기타 13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하였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 中城里 新羅碑)-(사진 : 문화재청)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 中城里 新羅碑)’는 2012년에 보물 제1758호로 지정된 현존 최고(最古)의 신라비이다. 이 비는 1면 12행에 모두 203자가 각자(刻字)되어 있으며, 신라 관등제의 성립 과정, 신라 6부의 내부 구조와 지방 통치, 분쟁 해결 절차, 궁(宮)의 의미, 사건 판결 후 재발방지 조치 등 신라의 정치·경제·문화상을 알려 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역사적·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비문의 글씨체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와 통하는 고예서(古隸書)로 신라특유의 진솔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단양적성비에서 보이는 고해서(古楷書)의 전초(顚草)이며 선구가 된다는 점에서 국보 제242호 울진 봉평리 신라비, 국보 제264호 포항 냉수리 신라비보다도 더욱 신라적 풍격을 보이고 있다. 이밖에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제작시기에서도 이미 국보된 지정된 지증왕 4년(503) 포항 냉수리 신라비, 법흥왕 11년(524) 울진 봉평리 신라비보다도 앞선 지증왕 2년(501)에 제작되어 국보로서 승격 가치가 있다.


‘금동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金銅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는 통일신라 46대 문성왕(재위 839~857)이 대중(大中) 3년(855)에 탑을 세우면서 납입한 금동판 형태의 발원문으로, 1824년에 경주 남산 창림사 삼층석탑이 도괴될 때 무구정광다라니경과 함께 발견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탑원기는 이미 발견된 금동염거화상탑지나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 등과 유사한 시기의 금속제 명문 자료로, 불교사는 물론 금속공예사, 서예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금동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金銅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사진 : 문화재청)


2014/09/12 - [경주문화유산답사/신라 천년 역사의 시작과 끝] - 창림사,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금동찰주본기(慶州 皇龍寺 九層木塔金銅刹柱本記)’는 통일신라 경문왕 11년에 왕의 명에 의해 황룡사의 구층목탑을 중수하면서 기록한 실물자료로, 구층목탑의 건립 과정과 중수 과정을 후대의 역사서가 아닌 중수 당시에 제작된 유물을 통해 생생히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 유행했던 탑지(塔誌)의 서술체계는 물론 서체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사리장치 품목과 안치장소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 탑파의 사리장엄 의식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사리함의 문비(門扉) 내․외면에 선각된 신장상은 절대연대(872년)를 가진 유품으로 불교조각사 연구에 기준이 된다.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금동찰주본기(慶州 皇龍寺 九層木塔金銅刹柱本記)-(사진 : 문화재청)


문화재청은 이번에 국보․보물로 지정 예고한 문화재 14건에 대하여 30일간의 지정 예고 기간을 거쳐 각계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할 예정이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http://www.cha.go.kr/)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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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의 능이다.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으로 무덤 주위에는 무덤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둘레돌을 돌렸다. 무덤 앞에 있는 귀부(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위에 얹혀 있는 이수(비석의 맨 윗부분을 장식하는 머릿돌로 보통 용 문양을 새겨둔다)의 앞면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새겨진 글귀로 인해 신라시대 왕들의 무덤 중 그 주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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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무열왕릉(新羅武烈王陵)
(사적 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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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의 이름은 춘추(春秋)로 신라 제25대 진지왕(재위 576~579)의 아들인 이찬(신라 17관등 중 두번째, 이척찬이라고도 함) 용춘(또는 용수)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신라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인 천명부인이다. 왕비는 문명부인으로 각찬(신라 17관등 중 첫번째, 이벌찬이라고도 함) 김서현의 딸로 김유신 장군의 누이동생인 문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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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태종무열왕릉비(新羅太宗武烈王陵碑)
국보 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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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비석 머릿돌) 앞면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3마리씩 6마리의 용이 뒤엉켜 있으며, 용이 받들고 있는 여의주 아래쪽에 "太宗武烈大王之碑"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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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 뒷면(중앙에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모습)

(조선시대 이우라는 사람이 쓴 『대동금석서속』이란 책에 이 비석에 새겨진 글을 쓴 사람이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왕은 의표(생각하는 것)가 영특(남달리 뛰어나고 훌륭함)하여 어려서부터 세상을 바로잡을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라 제28대 진덕왕(재위 647~654)을 섬겨 벼슬이 이찬에 이르렀다고 한다. 진덕여왕이 죽고 난 뒤에 성골출신으로 왕위에 오를만한 남자가 모두 없어지자 여러 신하들이 다음 왕위에 오를 사람으로 진골출신이자 상대등(신라시대 최고의 관직으로 법흥왕 때 처음 설치됨)인 알천(신라의 진골귀족이며 장군으로 선덕여왕 때 여근곡에 침입한 백제의 장군 우소의 군대를 모두 물리쳤다. 비담과 염종의 반란이 진압된 뒤 상대등이 되었다)을 지목하였지만 알천은 "나는 나이도 이미 늙었고 이렇다 할 덕행도 없으니, 지금 덕망이 융숭한 춘추공 같은 이는 실로 세상을 바로잡을 영걸이라 할 수 있다."고 사양하고 춘추를 지목하였다. 김춘추는 세 번이나 간곡하게 사양하다가 왕위에 오르니 52세의 늦은 나이로 신라 진골 출신의 첫 왕이 되었다.

642(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1)에 백제 의자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로 쳐들어와 신라의 40여개 성을 쳐서 빼앗고, 그해 8월에 장군 윤충을 보내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을 함락시켰다. 이곳의 성주는 이찬 품석(김춘추의 사위)으로 성이 함락되었을 때 아내와 함께 죽었다『삼국사기기록을 보면 딸과 사위의 죽음을 전해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어 하루 종일 눈 한번 깜박이지 아니하더니 이윽고 하는 말이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못 없앤단 말이냐하고, 선덕여왕에게 나아가 신은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고야 말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했지만 당시 고구려의 실권자인 연개소문은 이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에 김춘추는 신라 제28대 진덕여왕(재위 647~654)2(648)에 사신으로 당나라로 건너가서 당태종 이세민을 만나 나당동맹을 이끌어 내게 된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고 7년 째 되는 해인 660년 이찬 김유신을 승진시켜 상대등으로 삼고 백제를 멸망시킬 준비를 마친다. 같은 해 3월 당 고종은 소정방과 김인문(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을 장수로 삼아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게 한다. 같은 해 5월 태종무열왕은 김유신과 함께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떠나 6월에 남천정(지금의 경기도 이천군)에 도착하여 소정방의 군대를 기다린다.

중국 산둥반도(산동성)에서 출발한 당나라 군대는 황해를 건너와 7월에 덕물도(지금의 인천시 옹진군 덕적도)에 도착하여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태자인 법민(신라 제30대 문무대왕)과 만나 백제를 정벌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710일에 사비(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두 나라 군사가 만나 함께 백제의 도성을 치기로 약속한다.

소정방과 김인문의 13만 군대는 기벌포(지금의 금강 하구)에 도착하여 백제군을 크게 무너뜨리고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에 먼저 도착하였다. 태종무열왕의 명을 받은 김유신은 5만 군사를 이끌고 황산벌(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로 나가니 백제 장군 계백이 이끄는 5천 군사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신과 계백은 모두 네 번을 싸웠지만 승패를 결정짓지 못했다. 이때 화랑 반굴과 관창이 각각 혼자 백제군 진영으로 들어가 힘껏 싸우다 죽었는데, 이것을 보고 분노한 신라 군사들의 총공격에 계백을 비롯한 백제군은 전멸한다.

660712일에 나당연합군이 함께 만나 사비성을 포위하자 다음날 백제 의자왕은 신하들과 함께 밤에 도망하여 달아나 웅진성(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으로 피신한다. 사비성을 지키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이 먼저 항복하고 5일 뒤에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멸망하고 만다.

같은 해 11월 백제로부터 돌아온 태종무열왕은 백제정벌에서 전사한 자들과 전공을 세운 자들에게 상을 내려주었다. 661, 왕위에 오른 지 8년 만에 죽으니 나이 59세였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Posted by 이부장 ibuzang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김인문의 무덤으로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원형봉토분이며 특별한 장식이 없다. 무덤 앞의 건물에는 김인문의 업적을 새겼던 비석의 받침돌로 짐작되는 귀부(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가 있다.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둘째아들로 자(字: 주로 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 붙이는 일종의 이름)는 인수, 어머니는 문명태후(김유신의 둘째 여동생인 문희)이다.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의 친동생으로 어려서부터 일찍 학문을 배워서 식견이 넓었으며, 유학을 비롯하여 장자, 노자, 불교와 관련된 모든 책들을 읽었고, 특히 글을 잘 썼는데 아버지 태종무열왕의 비문을 직접 썼다고 한다. 또한 향악(삼국시대부터 궁중에서 전통음악의 한 갈래로 당나라에서 수입된 음악을 당악이라 하였고, 우리의 고유한 전통음악을 향악이라 불렀다)을 잘 했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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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문묘 (金仁問墓)
시도기념물 32호(경주시)


김인문은 신라의 장군이며 외교관으로 태종무열왕, 문무왕 그리고 김유신 장군을 도와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진덕여왕 때 왕명으로 당나라에 들어가면서 신라의 외교 문제를 담당하였는데, 그의 평생에 걸쳐 일곱번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는데 날짜로 계산을 하면 22년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신라 제32대 효소왕 3년(694) 4월, 66세의 나이로 당나라에서 죽었지만 그의 시신을 신라로 옮겨 다음해 서라벌의 서쪽 벌판(지금의 경주시 서악동)에서 장례를 치렀다.

660년 신라와 동맹을 맺은 당나라는 소정방에게 13만 대군으로 백제를 정벌하게 한다. 이때 김인문은 당나라 군대의 부사령관에 해당하는 "신구도부대총관"으로 소정방과 함께 백제정벌군을 이끌고 황해를 건너와 덕물도(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도)에 도착하였다.
태종무열왕은 태자 법민과 함께 장군 김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웅진구(지금의 금강 하구)에 이르러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의 수도 사비성(지금의 부여)으로 쳐들어가 백제를 멸망시켰다. 김인문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파진찬(신라 17관등 중 네번째)과 각간(신라 17관등 중 첫번째로 이벌찬이라고도 함)의 직위를 함께 받는다.

668년 문무왕과 함께 20만 대군을 이끌고 북한산성에 이르러 이적의 당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여 한달만에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문무왕은 고구려정벌의 공로를 인정하여 김유신에게 태대각간(대각간 위의 특별관등)을, 김인문에게 대각간(신라 17관등 위에 설치한 최고의 관직)의 직위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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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서악리 귀부((慶州西岳里龜趺)
(보물 70호)
(김인문의 무덤 옆에 있는데, 그의 업적을 새겨두었던 비석의 받침돌로 짐작하고 있다)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고구려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그리고 신라땅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고 하였다.

670년 3월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가 당나라를 먼저 공격하면서 7년 간에 걸친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때 당나라는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세워 신라를 지배하려고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675년 매초성(매소성, 지금의 경기도 양주) 싸움과 676년 기벌포(지금의 금강 하구) 해전의 큰 승리로 신라는 백제, 고구려, 당나라와의 기나긴 전쟁을 끝내고 일통삼한을 이룩하게 된다.

Posted by 이부장 ibuzang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모전석탑이다. 일반적으로 돌을 다듬어 쌓은 탑을 석탑이라 부르고 구운 전돌(벽돌)을 사용하여 쌓은 탑을 전탑, 나무를 이용하여 세운 탑을 목탑이라고 부른다.

동아시아의 중심이 되는 3국 가운데, 중국을 전탑의 나라, 일본을 목탑의 나라라 부르고 한국을 석탑의 나라로 부른다. 우리나라에도 물론 목탑과 전탑이 있었지만 현재 남아 있는 탑들의 대부분이 석탑들이다.

벽돌로 쌓은 전탑을 모방한 석탑을 보통 모전석탑이라고 부르는데 현재 경주에 남아 있는 모전석탑은 서악동3층석탑과 경주 남산동 동3층석탑(보물 124호)을 비롯하여 근래에 복원된 경주 서남산 용장계 지곡 제3사지 3층석탑 등 3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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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서악동 삼층석탑(慶州 西岳洞 三層石塔)
(보물 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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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탑몸돌에 새겨진 문과 인왕상

서악동 3층석탑은 높이가 5.1m로 탑신부(탑의 몸돌)를 받쳐주는 기단이 8매의 무사석(네모 받듯하게 다듬은 돌로 성벽이나 담벼락을 쌓는데 사용됨)을 서로 어긋나게 2단으로 쌓은 특이한 형태이다.
탑의 1층 몸돌의 동쪽면에는 문이 새겨져 있는데, 문 양옆에 인왕상(사찰이나 불교 건물의 문 또는 불상등을 지키는 불교의 수호신으로 보통 금강역사라 불린다) 2구가 돋을새김 되어 있다. 탑의 1층부터 3층 지붕돌(옥개석)의 윗면은 모두 전탑처럼 층급으로 이루어져 있어 모전석탑이라 불린다.

이 탑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전 문성왕릉, 헌안왕릉, 진지왕릉, 진흥왕릉이 있으며, 북쪽에는 높이 5m 내외의 신라고분들이 흩어져 있고, 남쪽에는 태종무열왕릉과 그 뒷편에 신라 왕릉급에 해당하는 거대한 서악동 고분 4기가 있다.
오래전부터 『삼국사기』에 기록된 진지왕과 태종무열왕의 무덤 위치를 알려주는 영경사라는 절이 있었던 절터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지가 않다.


Posted by 이부장 ibuz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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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덕사지(望德寺址)
사적 7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낭산 남쪽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사천왕사 맞은편에 있는 절터이다. 지금 이 곳에는 금당, 강당, 동서목탑, 중문, 회랑 등의 건물터가 남아있고 절의 서쪽 편에는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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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덕사지 당간지주(望德寺址幢竿支柱)
보물 69호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문무왕 19(679)에 중국 당나라가 침입하자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예부시랑 악붕귀를 사신으로 보내어 이를 확인하려 하였다.
신라에서는 나라를 보호하는 사천왕사를 보여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여 사천왕사 남쪽에 따로 새 절을 지어 보여 주었다.

당나라 사신이 절 앞에 이르러 말하기를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亡德遙山)의 절이군요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신라 사람들이 황금 1,000냥을 주었더니 당나라로 돌아가서 신라에서는 천왕사를 지어 놓고 새 절에서 당나라 황제의 장수를 빌고 있습니다.”라고 거짓으로 보고 하였다.
이후 신라에서는 당나라 사신이 말한 망덕요산에서 그 뜻을 가져와 이 절을 망덕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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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절터로 선덕여왕의 무덤이 있는 낭산 남쪽 아래에 있다. 사천왕사(사적 8호)는 2006년 4월 부터 2011년 현재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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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 동쪽 귀부

이 절터에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탑 및 좌우경루의 건물터를 비롯하여 머리가 잘려 나간 귀부 2기와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그리고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천왕 전(벽돌)은 신라에서 조각으로 유명한 양지스님의 작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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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 서쪽 귀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절들은 모두 금당(부처님을 모신 건물) 앞에 3층 또는 5층탑 하나만을 세우는 일탑가람 형식이었으나, 통일 이후에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탑을 세우는 쌍탑가람 형식으로 바뀌었는데, 이 사천왕사가 쌍탑가람 형식의 최초의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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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 당간지주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제30대 문무왕 때 중국의 당나라가 백제 멸망 후에 설치한 웅진도둑부를 신라가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때 중국 당나라에 있던 의상스님이 급히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자, 문무왕은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스님은 낭산 아래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코앞에 닥치자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모자랐다. 명랑스님은 임시로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12명의 스님들과 더불어 문두루비법(불교의 교파 중 밀교에서 행하는 비법으로 불단을 설치하고 다라니 등을 외우면 국가적인 재난을 물리치고 국가를 수호하여 사회를 편안하게 할 수 있다고 함)을 사용하였다. 그러자 당과 신라 군사들이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거센 바람과 커다란 파도가 크게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 후 5년 만에 절을 완성(문무왕 19년 : 679)하고 사천왕사라고 하였다.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의 월명스님은 신라의 노래인 향가 도솔가제망매가를 지었는데, 이 곳 사천왕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월명스님은 피리를 잘 불었는데, 달 밝은 밤에 피리를 불면 그 소리에 지나가는 달이 멈출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신라 사람들은 월명스님이 살던 사천왕사 앞 동네를 월명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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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낭산 정상에 있는 선덕여왕의 무덤이다. 외부 모습은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2~3단으로 둘레돌(무덤의 가장자리 기슭에 돌아가면서 늘어놓은 돌로 무덤의 흙이 무너져 내리 것을 막는 역할을 함)을 쌓고 다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무덤이다.

선덕여왕은 신라 제27대 왕(632647)으로 성은 김씨, 이름은 덕만이다. 진평왕의 큰 딸로 어머니는 마야부인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 : 성스러운 여자 황제)”란 호를 올렸다. 신라에서 여자인 선덕여왕이 처음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성골이라는 특수한 왕족 신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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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선덕여왕릉(新羅善德女王陵)
사적 182호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미리 알아서 맞춘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첫 번째는 공주로 있을 때 당 태종이 보내온 모란꽃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향기가 없는 꽃임을 알아맞힌 것으로 『삼국사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평왕 때에 당나라에서 얻어 온 모란꽃 그림과 그 씨앗을 덕만에게 보였더니 "이 꽃은 아름답긴 하나 향기가 없습니다" 하였다. 왕은 웃으며 "네게 어떻게 아느나?" 하니 "이 꽃은 뛰어나게 곱지만 그림에 나비와 벌이 없으니 이는 반드시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 하였다. 그 씨앗을 심어보니 과연 덕만의 말과 같았다.

두 번째는 여근곡(경주시 건천읍 부산 골짜기)에 백제군이 몰래 잠입한 것을 미리 알고 군사를 보내 소탕한 일이다.
『삼국사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 5년(636), 여름 5월에 개구리 떼가 대궐 서쪽 옥문지에 모여드니 왕이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개구리의 불거진 눈은 병사들의 모습이다. 내 일찍이 들으니 서남 변방에도 옥문곡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혹 백제군이 몰래 그곳에 들어 왔는지 알 수 없다"하고 장군 알천을 시켜 가서 수색케 하였더니 백제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려고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그 곳에 숨어 있으므로 알천이 들이쳐 다 잡아 베었다.


세 번째는 자신이 죽는 날을 미리 알아맞힌 것이다.삼국유사』에 선덕여왕이 죽기 전에 남긴 유언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왕이 아무 병이 없을 때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죽을 것인데 나를 도리천에 묻어 달라.”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해 다시 물으니, 왕은 낭산 남쪽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과연 그날이 되자 왕이 죽었고, 신하들은 낭산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왕이 낭산 아래에 사천왕사를 세우자 비로소 사람들은 그 뜻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도리천이란 하늘은 사천왕이 다스리는 사왕천이란 하늘 위에 있는 것인데, 낭산 아래 세워진 사천왕사가 사왕천이란 하늘이고 바로 위 왕의 무덤이 있는 낭산 정산이 바로 도리천이란 하늘이기 때문이다.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16년 동안 신라를 다스린 선덕여왕은 분황사와 영묘사를 비롯하여 천문관측대인 첨성대를 세웠다. 그리고 끊임없이 신라를 괴롭히는 백제와 고구려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선덕여왕 말년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의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의 조카인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이 이를 막아냈지만 선덕여왕은 이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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