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원원사지(사적 제46호)에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이다. 원원사가 세워진 시기에 대해서는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권제5 신주 제6 명랑신인조에 그 내용이 전해져 오고 있다.

또 신라 서울 동남쪽 20여 리 되는 곳에 원원사(遠源寺)가 있는데, 세상에 이런 말이 전한다.
"안혜 등의 네 대덕(안혜, 낭융, 광학, 대연)이 김유신(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장군), 김의원(신라 중대의 귀족), 김술종(신라의 진골출신으로 진덕여왕 때 삭주도독을 지냄,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화랑 죽지랑의 아버지) 등과 함께 발원하여 세운 절이다. 네 대덕의 유골은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혀 있기 때문에 이름을 사령산 조사암이라고 한다."

위의 내용으로 볼 때 원원사는 7세기 중엽에 세워진 사찰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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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원원사지 동ㆍ서 삼층석탑(慶州 遠願寺址 東ㆍ西 三層石塔)
(보물 제14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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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원사지 동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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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원사지 서탑

원원사지 두 탑은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2층 기단의 네 면의 각 기둥 사이에 3구씩 전체 12구의 십이지신상(땅을 지키는 열두 신장으로 열두 방향을 가리키는 방위신이기도 하다. 호랑이·토끼·용·뱀·말·소·원숭이·닭·돼지·개·쥐·양 등 열두 마리 짐승으로 몸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이 조각되어 있다. 이들 십이지신상은 모두 연꽃무늬 대좌에 앉아 있는데, 평복의 옷차림에 옷자락이 하늘로 날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동탑의 동쪽면 십이지상 1구와 서탑의 남쪽면 십이지신상 2구는 없어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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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원사지 동탑 십이지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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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원사지 서탑 십이지신상

두 탑의 1층 몸돌의 네 면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사천왕상(동서남북에서 부처님의 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동쪽의 지국천왕, 서쪽의 광목천왕, 남쪽의 증장천왕, 북쪽의 다문천왕 등이다. 우리나라 사찰의 입구에 있는 천왕문 안에 보통 모셔져 있다)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 중 서탑 남면의 사천왕상 1구는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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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원사지 동탑 사천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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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원사지 서탑 사천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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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 경주원원사지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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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부장 ibuzang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의 능이다.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으로 무덤 주위에는 무덤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둘레돌을 돌렸다. 무덤 앞에 있는 귀부(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위에 얹혀 있는 이수(비석의 맨 윗부분을 장식하는 머릿돌로 보통 용 문양을 새겨둔다)의 앞면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새겨진 글귀로 인해 신라시대 왕들의 무덤 중 그 주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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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무열왕릉(新羅武烈王陵)
(사적 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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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의 이름은 춘추(春秋)로 신라 제25대 진지왕(재위 576~579)의 아들인 이찬(신라 17관등 중 두번째, 이척찬이라고도 함) 용춘(또는 용수)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신라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인 천명부인이다. 왕비는 문명부인으로 각찬(신라 17관등 중 첫번째, 이벌찬이라고도 함) 김서현의 딸로 김유신 장군의 누이동생인 문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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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태종무열왕릉비(新羅太宗武烈王陵碑)
국보 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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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비석 머릿돌) 앞면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3마리씩 6마리의 용이 뒤엉켜 있으며, 용이 받들고 있는 여의주 아래쪽에 "太宗武烈大王之碑"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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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 뒷면(중앙에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모습)

(조선시대 이우라는 사람이 쓴 『대동금석서속』이란 책에 이 비석에 새겨진 글을 쓴 사람이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왕은 의표(생각하는 것)가 영특(남달리 뛰어나고 훌륭함)하여 어려서부터 세상을 바로잡을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라 제28대 진덕왕(재위 647~654)을 섬겨 벼슬이 이찬에 이르렀다고 한다. 진덕여왕이 죽고 난 뒤에 성골출신으로 왕위에 오를만한 남자가 모두 없어지자 여러 신하들이 다음 왕위에 오를 사람으로 진골출신이자 상대등(신라시대 최고의 관직으로 법흥왕 때 처음 설치됨)인 알천(신라의 진골귀족이며 장군으로 선덕여왕 때 여근곡에 침입한 백제의 장군 우소의 군대를 모두 물리쳤다. 비담과 염종의 반란이 진압된 뒤 상대등이 되었다)을 지목하였지만 알천은 "나는 나이도 이미 늙었고 이렇다 할 덕행도 없으니, 지금 덕망이 융숭한 춘추공 같은 이는 실로 세상을 바로잡을 영걸이라 할 수 있다."고 사양하고 춘추를 지목하였다. 김춘추는 세 번이나 간곡하게 사양하다가 왕위에 오르니 52세의 늦은 나이로 신라 진골 출신의 첫 왕이 되었다.

642(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1)에 백제 의자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로 쳐들어와 신라의 40여개 성을 쳐서 빼앗고, 그해 8월에 장군 윤충을 보내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을 함락시켰다. 이곳의 성주는 이찬 품석(김춘추의 사위)으로 성이 함락되었을 때 아내와 함께 죽었다『삼국사기기록을 보면 딸과 사위의 죽음을 전해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어 하루 종일 눈 한번 깜박이지 아니하더니 이윽고 하는 말이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못 없앤단 말이냐하고, 선덕여왕에게 나아가 신은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고야 말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했지만 당시 고구려의 실권자인 연개소문은 이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에 김춘추는 신라 제28대 진덕여왕(재위 647~654)2(648)에 사신으로 당나라로 건너가서 당태종 이세민을 만나 나당동맹을 이끌어 내게 된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고 7년 째 되는 해인 660년 이찬 김유신을 승진시켜 상대등으로 삼고 백제를 멸망시킬 준비를 마친다. 같은 해 3월 당 고종은 소정방과 김인문(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을 장수로 삼아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게 한다. 같은 해 5월 태종무열왕은 김유신과 함께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떠나 6월에 남천정(지금의 경기도 이천군)에 도착하여 소정방의 군대를 기다린다.

중국 산둥반도(산동성)에서 출발한 당나라 군대는 황해를 건너와 7월에 덕물도(지금의 인천시 옹진군 덕적도)에 도착하여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태자인 법민(신라 제30대 문무대왕)과 만나 백제를 정벌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710일에 사비(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두 나라 군사가 만나 함께 백제의 도성을 치기로 약속한다.

소정방과 김인문의 13만 군대는 기벌포(지금의 금강 하구)에 도착하여 백제군을 크게 무너뜨리고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에 먼저 도착하였다. 태종무열왕의 명을 받은 김유신은 5만 군사를 이끌고 황산벌(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로 나가니 백제 장군 계백이 이끄는 5천 군사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신과 계백은 모두 네 번을 싸웠지만 승패를 결정짓지 못했다. 이때 화랑 반굴과 관창이 각각 혼자 백제군 진영으로 들어가 힘껏 싸우다 죽었는데, 이것을 보고 분노한 신라 군사들의 총공격에 계백을 비롯한 백제군은 전멸한다.

660712일에 나당연합군이 함께 만나 사비성을 포위하자 다음날 백제 의자왕은 신하들과 함께 밤에 도망하여 달아나 웅진성(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으로 피신한다. 사비성을 지키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이 먼저 항복하고 5일 뒤에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멸망하고 만다.

같은 해 11월 백제로부터 돌아온 태종무열왕은 백제정벌에서 전사한 자들과 전공을 세운 자들에게 상을 내려주었다. 661, 왕위에 오른 지 8년 만에 죽으니 나이 59세였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Posted by 이부장 ibuzang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김인문의 무덤으로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원형봉토분이며 특별한 장식이 없다. 무덤 앞의 건물에는 김인문의 업적을 새겼던 비석의 받침돌로 짐작되는 귀부(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가 있다.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둘째아들로 자(字: 주로 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 붙이는 일종의 이름)는 인수, 어머니는 문명태후(김유신의 둘째 여동생인 문희)이다.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의 친동생으로 어려서부터 일찍 학문을 배워서 식견이 넓었으며, 유학을 비롯하여 장자, 노자, 불교와 관련된 모든 책들을 읽었고, 특히 글을 잘 썼는데 아버지 태종무열왕의 비문을 직접 썼다고 한다. 또한 향악(삼국시대부터 궁중에서 전통음악의 한 갈래로 당나라에서 수입된 음악을 당악이라 하였고, 우리의 고유한 전통음악을 향악이라 불렀다)을 잘 했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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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문묘 (金仁問墓)
시도기념물 32호(경주시)


김인문은 신라의 장군이며 외교관으로 태종무열왕, 문무왕 그리고 김유신 장군을 도와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진덕여왕 때 왕명으로 당나라에 들어가면서 신라의 외교 문제를 담당하였는데, 그의 평생에 걸쳐 일곱번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는데 날짜로 계산을 하면 22년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신라 제32대 효소왕 3년(694) 4월, 66세의 나이로 당나라에서 죽었지만 그의 시신을 신라로 옮겨 다음해 서라벌의 서쪽 벌판(지금의 경주시 서악동)에서 장례를 치렀다.

660년 신라와 동맹을 맺은 당나라는 소정방에게 13만 대군으로 백제를 정벌하게 한다. 이때 김인문은 당나라 군대의 부사령관에 해당하는 "신구도부대총관"으로 소정방과 함께 백제정벌군을 이끌고 황해를 건너와 덕물도(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도)에 도착하였다.
태종무열왕은 태자 법민과 함께 장군 김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웅진구(지금의 금강 하구)에 이르러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의 수도 사비성(지금의 부여)으로 쳐들어가 백제를 멸망시켰다. 김인문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파진찬(신라 17관등 중 네번째)과 각간(신라 17관등 중 첫번째로 이벌찬이라고도 함)의 직위를 함께 받는다.

668년 문무왕과 함께 20만 대군을 이끌고 북한산성에 이르러 이적의 당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여 한달만에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문무왕은 고구려정벌의 공로를 인정하여 김유신에게 태대각간(대각간 위의 특별관등)을, 김인문에게 대각간(신라 17관등 위에 설치한 최고의 관직)의 직위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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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서악리 귀부((慶州西岳里龜趺)
(보물 70호)
(김인문의 무덤 옆에 있는데, 그의 업적을 새겨두었던 비석의 받침돌로 짐작하고 있다)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고구려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그리고 신라땅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고 하였다.

670년 3월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가 당나라를 먼저 공격하면서 7년 간에 걸친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때 당나라는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세워 신라를 지배하려고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675년 매초성(매소성, 지금의 경기도 양주) 싸움과 676년 기벌포(지금의 금강 하구) 해전의 큰 승리로 신라는 백제, 고구려, 당나라와의 기나긴 전쟁을 끝내고 일통삼한을 이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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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에 있는 신라 제23대 법흥왕의 능이라고 전해오는 무덤이다. 경주의 서악이라 불리는 선도산 서쪽 기슭에서 뻗은 낮은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무덤의 내부구조는 알 수 없는데 겉모양은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원형봉토분이다. 삼국시대 신라 왕릉으로는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한다. 무덤의 아래쪽에는 냇돌로 쌓은 둘레돌(무덤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는 역할)이 드문드문 들어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법흥왕은 재위 27년에 죽으니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하였고,삼국유사에서도 왕의 능은 애공사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현재 이 무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라 말기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3층석탑이 있는데 애공사지탑(효현리 3층석탑)이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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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법흥왕릉(新羅法興王陵)
사적 176호

삼국사기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왕들의 능묘 위치를 살펴 보면 신라 22대 지증왕(500~514)까지는 오릉·미추왕릉·내물왕릉을 제외한 다른 왕들의 무덤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된 것이 없는데, 법흥왕 이후부터 신라 왕들에 대해서는 왕릉의 위치나 장례지가 주변에 있던 사찰을 중심으로 방위나 산 이름 또는 지역명 등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증왕과 법흥왕 사이를 경계로 한 이러한 기록상의 차이는 바로 왕릉들의 입지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신라고분은 6세기 초를 중심으로 그 이전까지는 평지에 돌무지덧널무덤이 축조되었으나, 그 뒤부터는 산기슭으로 옮겨지고 내부구조도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뀐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법흥왕릉 부터 시작되는 신라 왕릉의 소재지에 대한 기록은 바로 신라고분이 변화하는 과정을 문헌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법흥왕부터 신라의 왕들의 무덤이 평지에서 산지로 이동하는 것은 이 때 공인된 불교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도 보인다.

법흥왕은 신라 제23대 왕(재위 514540)으로 성은 김씨, 이름은 원종이며 지증마립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연제부인 박씨이고, 왕비는 보도부인 박씨이다. 키가 7척이나 되고 마음이 너그럽고 넓었으며 백성들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지증왕 때부터 시작된 정치 개혁을 이어 받아 신라를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로 완성시킨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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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년에 병부(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곳)가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왕을 중심으로 한 고대 국가 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권을 왕이 직접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520년에는 율령(형법과 법에 의한 명령)을 반포하고 백관(벼슬아치)공복(벼슬아치들이 조정에 나갈 때 입는 옷)을 정하였다.

531년에 상대등(지금의 수상과 같은 역할)을 설치하였는데 이찬(17관등 중 두 번째 관등) 철부가 최초의 상대등이 되었다.

법흥왕은 안으로 나라의 질서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밖으로는 영토 확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522년에 백제의 압박에 반발한 대가야 왕이 사신을 보내 결혼을 요청하자 왕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을 보내 결혼 동맹을 맺어 백제를 견제하였다. 그 뒤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추진하여 524년에는 남쪽의 국경 지방을 순수(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보살피며 돌아다니는 것)하고 영토를 개척하였다. 이 때 금관가야의 왕(김구해)이 와서 법흥왕을 만났으며 532년에 금관가야의 김구해 왕은 세 아들인 노종, 무덕, 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과 함께 신라에 항복함으로 합병되었다. 신라 일통삼한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되는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은 벼슬이 각간(17관등 중 첫 번째인 이벌찬)에 이른다.
금관가야의 항복으로 신라는 낙동강과 남해안의 요지인 김해를 발판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법흥왕은 왕권 강화 정책과 영역 확장 등을 통해 국력이 크게 오르자 536년에 신라 최초의 독자적 연호인 건원(建元)”을 사용하였다. 중국의 주변 국가들은 보통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는데 신라만의 독자적인 연호 사용함으로써 중국과 대등한 관계임을 드러낸 자주 의식의 표현이라는 데 역사적 의미가 있다.

521년에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이 때 신라에 사신으로 온 승려 원표로 인해 불교가 신라왕실에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불교가 신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5세기 초 신라 제19대 눌지마립간(417~458) 때이거나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로 보고 있다. 신라 제21대 소지마립간(479~500) 때 고구려에서 온 아도는 초기 신라불교의 개척자였다. 그는 묵호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자 3명과 함께 일선군(지금의 경북 선산) 모례(신라 최초의 불교신자)의 집에 숨어 살면서 일반 백성들에게 불교를 전하였다.

일반 백성들에게 전해진 불교는 신라의 귀족으로부터 배척 받았다. 법흥왕은 불교를 크게 일으키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고민하던 중 528년에 이차돈의 순교하면서 국가적 공인이 이루어졌다.

법흥왕은 말년에 승려가 되어 법호를 법공(또는 법운)이라 하였다. 재위 27(540) 만에 죽자 시호(지증마립간 때 처음으로 사용)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 북쪽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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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낭산 정상에 있는 선덕여왕의 무덤이다. 외부 모습은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2~3단으로 둘레돌(무덤의 가장자리 기슭에 돌아가면서 늘어놓은 돌로 무덤의 흙이 무너져 내리 것을 막는 역할을 함)을 쌓고 다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무덤이다.

선덕여왕은 신라 제27대 왕(632647)으로 성은 김씨, 이름은 덕만이다. 진평왕의 큰 딸로 어머니는 마야부인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 : 성스러운 여자 황제)”란 호를 올렸다. 신라에서 여자인 선덕여왕이 처음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성골이라는 특수한 왕족 신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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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선덕여왕릉(新羅善德女王陵)
사적 182호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미리 알아서 맞춘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첫 번째는 공주로 있을 때 당 태종이 보내온 모란꽃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향기가 없는 꽃임을 알아맞힌 것으로 『삼국사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평왕 때에 당나라에서 얻어 온 모란꽃 그림과 그 씨앗을 덕만에게 보였더니 "이 꽃은 아름답긴 하나 향기가 없습니다" 하였다. 왕은 웃으며 "네게 어떻게 아느나?" 하니 "이 꽃은 뛰어나게 곱지만 그림에 나비와 벌이 없으니 이는 반드시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 하였다. 그 씨앗을 심어보니 과연 덕만의 말과 같았다.

두 번째는 여근곡(경주시 건천읍 부산 골짜기)에 백제군이 몰래 잠입한 것을 미리 알고 군사를 보내 소탕한 일이다.
『삼국사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 5년(636), 여름 5월에 개구리 떼가 대궐 서쪽 옥문지에 모여드니 왕이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개구리의 불거진 눈은 병사들의 모습이다. 내 일찍이 들으니 서남 변방에도 옥문곡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혹 백제군이 몰래 그곳에 들어 왔는지 알 수 없다"하고 장군 알천을 시켜 가서 수색케 하였더니 백제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려고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그 곳에 숨어 있으므로 알천이 들이쳐 다 잡아 베었다.


세 번째는 자신이 죽는 날을 미리 알아맞힌 것이다.삼국유사』에 선덕여왕이 죽기 전에 남긴 유언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왕이 아무 병이 없을 때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죽을 것인데 나를 도리천에 묻어 달라.”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해 다시 물으니, 왕은 낭산 남쪽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과연 그날이 되자 왕이 죽었고, 신하들은 낭산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왕이 낭산 아래에 사천왕사를 세우자 비로소 사람들은 그 뜻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도리천이란 하늘은 사천왕이 다스리는 사왕천이란 하늘 위에 있는 것인데, 낭산 아래 세워진 사천왕사가 사왕천이란 하늘이고 바로 위 왕의 무덤이 있는 낭산 정산이 바로 도리천이란 하늘이기 때문이다.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16년 동안 신라를 다스린 선덕여왕은 분황사와 영묘사를 비롯하여 천문관측대인 첨성대를 세웠다. 그리고 끊임없이 신라를 괴롭히는 백제와 고구려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선덕여왕 말년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의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의 조카인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이 이를 막아냈지만 선덕여왕은 이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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