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시 탑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능으로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는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모두 5기가 있으며,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알영, 2대 남해차차웅(재위 4~24), 3대 유리이사금(재위 24~57), 5대 파사이사금(재위 80~112)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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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오릉 (新羅五陵)
(사적 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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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는 오릉이 혁거세거서간의 단독 무덤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박혁거세는 6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칠일 후 시신이 땅에 흩어져 떨어졌고 왕비도 세상을 떠났다. 나라 사람들이 한 곳에 장사를 지내려 하자 큰 뱀이 이를 방해했다. 그래서 머리와 사지(두 팔과 두 다리를 통틀어 이르는 말)를 제각각 장사 지내 오릉으로 만들었는데 이를 사릉이라고도 한다. 담엄사 북쪽의 능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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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영정(閼英井)
(비지정 문화재) 

오릉 동쪽 대나무 숲 가운데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이 태어난 우물인 알영정의 옛 자취가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 5년(기원전 54) 정월에 용이 알영정에 나타났다. 용은 오른쪽 갈빗대에서 계집아이 하나를 낳았다. 늙은 할멈이 이 광경을 보고는 이상히 여기어 계집아이를 데려다 길렀다. 그리고는 우물 이름을 따서 계집아이의 이름을 지었다.”라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내용상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삼국유사에도 사량리 알영정(아리영정이라고도 한다)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계집아이 하나를 낳았다.(혹은 용이 나타나 죽었는데 그 배를 갈라 얻었다고도 한다) 여자 아이의 얼굴과 용모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아이를 월성 북천에서 목욕시키자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 때문에 시내 이름을 발천이라 했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현재 알영정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동경잡기(조선 헌종 11, 1845년에 만들어진 경주에 대한 책)에 따르면, 경주부의 남쪽 5리에 있었다고 한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거서간의 성은 박씨, 왕비는 알영부인이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로 왕이란 뜻이다. 또는 귀인을 이르는 말이다. 13(기원57)에 여섯 마을(진한 또는 사로육촌)의 촌장들이 추대(어떤 사람을 높은 자리에 오르게 하여 받듦)하여 왕위에 올라 61년간 신라를 다스렸다.

신라 제2대 남해차차웅은 혁거세거서간과 알영부인의 아들로 왕비는 운제부인(또는 아로부인)이다. 재위기간 중 낙랑의 침입으로 금성이 포위되기도 하였고, 왜인들의 침입을 받기도 하였다. 재위 21(24) 만에 죽으니 사릉원(현재의 오릉)에 장사지냈다. 왕의 명칭인 차차웅은 다른 말로 자충이라고도 한다. 화랑세기(신라 화랑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를 지은 김대문은 자충은 무당을 말하는 방언이라고 하였다.

신라 제3대 유리이사금은 남해차차웅의 아들로 왕비는 갈문왕(신라시대 왕과 일정한 관계를 가진 최고 성씨집단의 족장 또는 가계의 장에게 준 호칭으로 왕에 준하는 특수한 지위를 가짐) 일지의 딸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석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는데, 탈해가 사양하였다. 그리고 서로 떡을 물어 이의 자국이 많은 사람이 왕이 되기로 하였는데 유리이사금의 이의 숫자가 많아 왕위에 올랐다. 이런 이유로 이때부터 왕의 명칭을 이사금이라고 불렀다. 왕위에 있으면서 사로육촌을 육부로 고치고 성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17관등을 설치하였다. 재위 34(57) 만에 죽으니 사릉원(지금의 오릉)에 장사지냈다.

신라 제5대 파사이사금은 유리왕의 둘째 아들로 왕비는 김씨 사성부인이다. 탈해이사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 중 백제와 가야의 침입을 받았다. 101년에 월성을 쌓고 왕궁을 금성에서 월성으로 옮겼다. 102년에 진한의 소국들 중 음집벌국(지금의 경주시 안강읍)과 실직곡국(지금의 강원도 삼척시), 압독국(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을 점령하여 영토를 크게 넗혔다. 재위 33(112)에 죽으니 사릉원(지금의 오릉)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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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덕전 (崇德殿)
(문화재자료 254호) 

오릉 남쪽에 숭덕전(문화재자료 254)이 있는데,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조선 세종 11(1429)에 처음 세웠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3(1600)에 다시 지었고 숙종 20(1694)에 고쳤다. 처음에는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으나 임진왜란 이후 박씨 문중에서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사를 지내고 있다.

Posted by 이부장 ibuzang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2014년 7월 15일(화)부터 10월 26일(일)까지 신라역사관 로비에서 특집진열 ‘경주 금척리 신라 무덤’을 마련합니다.



경주의 중심부가 아닌 외곽 지역에서 발견되는 돌무지덧널무덤의 대표적인  예가 경주 금척리(金尺里) 신라 무덤입니다. 이 금척리에 있는 신라 무덤들은 커다란 묘역을 형성하고 있으며, 현재 사적 제4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번 특집진열에서 소개하는 금척리 무덤은 사적의 구역 밖에서 1981년 상수도 공사 중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조사하였습니다. 최근 부장품들에 대한 보존처리를 마치고 공개하는 것입니다. 


이 돌무지덧널무덤에서는 200여점의 부장품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은제 허리띠, 유리구슬 목걸이, 금귀걸이, 큰 쇠칼과 장식, 발걸이[鐙子] 등 45점을 전시합니다. 무덤 내부에 2개의 나무덧널[木槨]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부장품으로 미루어 볼 때 부부(夫婦)의 합장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무덤의 연대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 무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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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A 은제허리띠(사진 : 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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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A 큰 쇠칼과 장식(사진 : 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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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A 발걸이(사진 : 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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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B 유리구슬 목걸이(사진 : 국립경주박물관)


금척리 일대는 신라 6부 중 하나인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받은 ‘금으로 만든 자[金尺]’를 숨기기 위해 거짓으로 여러 기의 무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금으로 만든자(金尺) 이야기~동경잡기, 금척원(金尺院)조

부(경주)의 서쪽 25리 떨어진 곳에 있다. 전설에 신라의 왕이 황금으로 된 자를 하나 얻었는데, 사람이 죽거나 병들거나 했을 때 이 자를 가지고 그것을 재면 죽은 사람은 살아나고 병든 사람은 일어났으므로 나라의 보배가 되었다.

중국에서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그것을 요구했으나 신라의 왕은 그것을 주지 않으려고 이곳(금척원)에 숨기고 산을 30여개나 만들어 그것을 비밀로 하였다. 그리고 원사(院舍)를 세웠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혹은 신라의 시조(박혁거세 거서간)가 미천할 때 꿈에 신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황금자를 그에게 주며 말하기를 "너는 문무에 뛰어나고 신성하여 백성이 바라본지가 오래 되었으니 이 황금자를 가지고 금주발(금으로 만든 뚜껑이 있는 밥그릇)을 바로 잡으라"고 하였는데 꿈을 깨보니 황금자가 손에 들여 있었다고 하였다.



자료출처 : 국립경주박물관 홈페이지 보도자료(http://gyeongju.museum.go.kr/)


이 자료에 대하여 더욱 자세한 내용을 원하시면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 연구사 이진민(☎054-740-7542)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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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월성동 |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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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부장 ibuzang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조선시대 경주의 역사와 문화,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사상, 정서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특별전 917()부터 1110()까지 개최합니다. 


신라의 수도(首都)로서 천년 동안 번영을 누렸던 경주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하나의 지방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쪽의 서울을 뜻하는 동경(東京)’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나라의 매우 중요한 고을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오랜 역사적 전통과 위상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경주에서는 또 다른 천년의 문화가 꽃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와 조선시대의 경주는, 신라시대의 경주에 가려져 그다지 주목받지 못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경주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고려시대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시대를 살았던 경주 사람들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이러한 점을 인식하여 신라 이후의 경주를 재조명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서 조선시대의 경주에 대한 특별전을 처음으로 개최합니다.

조선시대 경주 사람들은 신라의 수도였던 역사적 전통을 바탕으로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자신의 고장인 경주를 특별히 동경(東京)’, ‘동도(東都)’라고 즐겨 불렀던 사실은 경주 사람들의 자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번 전시에는 이러한 조선시대 경주의 역사와 문화, 당시 사람들의 생활, 그리고 그들의 생각과 정서를 보여주는 180여 점의 문화재가, ‘조선의 동쪽 서울, 경주’, ‘경주에 살다’, ‘학문과 사상이 꽃피다’, ‘신라의 전통을 이어가다’, ‘싸워서 나라를 지키다’, ‘불교문화를 다시 일으키다’, 등 모두 6개의 주제로 나뉘어 선보입니다.


1. ’조선의 동쪽 서울, 경주

조선시대에 경주는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성을 띠는 지역으로 높은 위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18세기 말에 경주를 그린 회화식 지도인 경주읍내전도(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가 경주를 처음 찾아옵니다. 아울러 1699년 경주 부사(부윤) 민주면(閔周冕)의 주도로 경주에서 간행한 경주 지역의 역사지리지인 동경잡기(東京雜記)가 판목과 나란히 선보이며, 조선시대 역대 경상도 관찰사의 명단으로서 경주에 보관되어 왔던 당하제명기(棠下題名記)도 전시됩니다.

경주는 일찍이 조선 태조 재위시절에 태조 어진을 봉안하였던 중요한 고을이었습니다(집경전(集慶殿). 전주 경기전(慶基殿)의 태조 어진(보물 제931)도 경주 집경전의 태조 어진을 모사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번 전시에는 전주 경기전의 태조 어진 복제품이 참고자료로 나옵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경주 집경전의 태조 어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아울러 경주에 오가는 사신이 머물었던 관사(官舍)인 동경관(東京館)의 현판과 함께, 동경관에 모셔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임금의 상징인 전패殿牌가 처음으로 공개됩니다.


2. ’경주에 살다

조선시대의 경주는 지금의 경주시와 울산, 포항, 영천 등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습니다. 이 시기 경주 사람들의 생활과 경제적, 사회적 배경을 여러 문헌기록으로 살펴봅니다. 특히 1669년 경주 부윤이었던 병와 이형상(1653~1719)이 주관한 유교적 예법인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기록하고 그린 동도향음례(東都鄕飮禮)(인천시립박물관 소장)가 경주를 찾아옵니다. 아울러 경주 양동마을 관련 자료, 경주 출신으로 과거시험에서 장원 급제하였던 질암 최벽(1762~1813)의 합격증서인 홍패(紅牌), 조선 전기에 경주에서 만들어 한양에 바쳤던 장흥고(長興庫)글자가 새겨진 분청사기 등이 전시됩니다.


3. ’학문과 사상이 꽃피다

경주는 신라 때부터 유학의 전통을 자랑하는 유서깊은 고장이었습니다. 경주에 7년 동안 머물며 우리나라 최고의 전기체(傳奇體) 소설인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던 매월당 김시습(1435~1493) 관련 자료,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신라 금석문에 대한 학문적 관심과 열정을 보여주는 문무왕비편이 출품됩니다. 회재 이언적(14911553)은 조선 성리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려 동방오현(東方五賢)의 한 명으로 추앙되고 있는 경주 안강 출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입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중용구경연의같은 그의 저술과 친필이 전시됩니다. 이 밖에 경주는 수운 최제우(1824~1864)의 고향으로서 동학(東學)의 발상지였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므로 경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4. ’신라의 전통을 이어가다

조선시대의 경주 사람들은 주변에 산재한 신라의 문화유산들을 보전하며 새로운 문화와 사상을 창조해 나갔습니다. 성덕대왕신종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번 특별전에서는 종각 중수기 현판 2(1826, 1897), 종각에 종을 매다는 데 사용했던 걸쇠 한 쌍, 종을 쳤던 당목(撞木)을 모두 공개합니다. 그리고 옛 신라 왕에 대한 지속적인 숭배를 보여주는 1904년 작 경순왕 영정(경북유형문화재 제410)과 함께, 경주 김씨 사당인 숭혜전(崇惠殿)에 보관되어 왔던 의례용 가마를 최초로 공개합니다. 이와 더불어 신라 때 나라를 지켜주던 보물인 만파식적(萬波息笛)과 동일시되어 조선시대에도 신기의 보물로 인식되었던 옥피리(옥적)도 상세히 소개됩니다.


5. ’싸워서 나라를 지키다

임진왜란(1592~1598)은 조선시대 경주의 역사에서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나라와 고장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당시 사람들의 노력을 조명합니다. 경주읍성의 탈환에 사용하여 일본군을 물리쳤던 신무기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비롯하여, 세 발의 총을 한 번에 쏠 수 있는 삼안총(三眼銃)(보물 제884), 경주 부윤의 갑옷과 투구, 경주 의병들의 활약과 우국충정의 정신을 보여주는 각종 문집 등이 전시됩니다.


6. ‘불교문화를 다시 일으키다

임진왜란 때 불교계는 일본군에 맞서 싸워 전란 극복에 기여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피해를 입은 사찰의 복구를 위해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1680년의 분황사 보광전 중창문, 기림사의 중수를 후원한 경주 부윤을 기리는 1786년의 김부윤공덕비, 그리고 기림사 대적광전의 소조비로자나불상 안에 들어있던 조선 전기의부모은중경(보물 제959-4-2)가 선보입니다. 특히 통일신라 석탑인 안강 정혜사 터 십삼층석탑에서 나온 1765년의 중수기 목판은 이번 전시에서 실물이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조선 후기에 활발했던 불교신앙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이 특별전이 조선시대의 경주에서 살았던 선인들의 문화와 삶, 그리고 생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이 전시회를 계기로 경주의 조선시대에 대한 새롭고 다양한 연구와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희망합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앞으로도 경주의 고려와 조선시대를 조명하는 특별전들을 지속적으로 열어 갈 것이며, 그 성과는 국립경주박물관 상설전시의 시대적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데 반영될 것입니다.



기간: 2013917() ~ 1110() 월요일 휴관

장소: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

 

이 자료에 대하여 더욱 자세한 내용을 원하시면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 학예연구사 허형욱(054-740-7535)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자료출처 : 국립경주박물관 홈페이지(http://gyeongju.museum.go.kr/) 보도자료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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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월성동 |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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