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7월 21일부터 11월 1일까지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 특별전을 개최합니다. 이 전시회는 국립경주박물관의 개관 70주년 기념전이자, “실크로드 경주 2015”의 선도적 테마 행사입니다.  

  신라의 문화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국내 특별전으로서는 처음인 이번 전시회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조사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황금문화’, ‘능묘’, ‘대외교류’, ‘왕경’, ‘불국토’ 등의 5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부별 전시품으로서 금관총(金冠塚) 금관 등 국가지정문화재 22건 30점을 포함한 600여 점의 다양한 신라 문화재가 선보이며, 특히 국보 제83호 금동 반가사유상이 최초로 경주에 전시됩니다(단, 2주간만 전시: 7.21.~8.2.).



■ 전시 기간: 2015년 7월 21일(화) ~ 11월 1일(일)  ※월요일 휴관

■ 전시 장소: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

■ 후원: 경주시, 경주엑스포조직위원회, 경주박물관회


제1부. 황금문화  

  오늘날의 시각적 표상으로서 신라가 부각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시기부터였습니다. 근대적 학문인 실증적 역사학과 고고학, 미술사학의 관점에서 신라문화가 재조명되며 ‘문화재’라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가 등장하였습니다. 대표적 사례는 1921년 금관의 발견이었습니다. 금관총에서 금관을 비롯해 처음 보는 신라의 황금 유물들이 세상에 불쑥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신라의 이미지는 인쇄술과 사진의 발달로 인해 더욱 생생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금관총 금관을 비롯하여 경주 보문동합장분 출토 금귀걸이, 경주 노서동 출토 금목걸이 등 일제강점기에 출토된 신라 황금문화재를 예로 들어 이와 같은 내용을 살펴봅니다.     



제2부. 능묘 

  광복 이후 우리 손으로 시작한 신라능묘의 발굴은 1970년대에 큰 전환기를 맞았습니다. 삼국 통일을 이룬 신라를 정통으로 보는 민족사관을 바탕으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가 집중적으로 조명되었습니다. 1973년부터 경주고도개발사업이 추진되면서,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비롯한 경주 시내의 대형 능묘들이 발굴되는 등 신라문화에 대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그 성과는 1974년 10월 대릉원의 개원 그리고 1975년 7월 국립경주박물관의 신축 개관과 함께 공개되면서, 신라 왕릉의 실체와 의의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보여주는 광복 이후 신라능묘 출토품과 금제 관식, 은제 관모 등 천마총·황남대총의 화려하고 다양한 부장품을 전시합니다. 



제3부. 대외교류   

  1970년대의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신라 마립간 시기의 각종 금제품과  돌무지덧널무덤의 연원을 북방 초원지대로 보는 설이 제기되었습니다. 아울러 당(唐), 중앙아시아, 인도에까지 구법승(求法僧)이 오갔던 신라 통일기의 국제적 성격 등도 거론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신라문화 연구의 다각화와 함께 그 범위와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음을 환기시켜 주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계림로 14호묘 보검, 황남대총의 봉수형 유리병, 식리총 식리 등을 전시합니다. 또한, 신라 통일기의 활발한 대외교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경주고등학교 소장의 무인석상이 처음으로 박물관 전시에 선보입니다.  



제4부. 왕경 

  경주 시내의 대형 능묘 발굴이 일단락된 뒤, 신라 왕경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하여 다양한 성격의 유적들이 조사되기 시작했습니다. 장기간에 걸쳐 월지(안압지)와 황룡사터 등의 대형 유적이 발굴되었으며, 생활 유적들도 조사되어 왕경의 구조와 특징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촉발되었습니다. 올해부터는 월성 내부의 발굴, 일제강점기에 부실하게 수습되었던 금관총의 발굴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월지의 용얼굴무늬 기와와 보상화무늬 전, 황룡사터의 각종 공예품, 경주박물관 남쪽 부지에서 나온 ‘東宮衙’가 새겨진 단지 등이 전시됩니다. 



제5부. 불국토 

  불교미술품이 학문적 연구 대상이 되고, ‘문화재’라는 가치가 부여된 것도 일제강점기부터였습니다. 불상의 복장품이나 불탑의 사리장엄구를 도굴하여 불법으로 거래하는 나쁜 풍조가 생긴 것도 이 때부터였습니다. 이로 인해 문화재가 파괴되고 그 출처를 알 수 없게 되는 등 그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5부에서는 신라 불교문화의 융성을 보여주는 불상과 불교공예품들이 전시됩니다. 특히 국보 제83호 금동 반가사유상이 경주에서 처음으로 전시됩니다(전시 기간 7.21.~8.2.). 이밖에 경주 구황동 석탑의 국보 제79호 금제 아미타불좌상(전시기간 8.4.~11.1.), 사천왕사터 출토 ‘東塔西’가 새겨진 금동 장식, 경주경찰서 소장의 부처가 새겨진 탑신석(경주 외동읍 입실리 절터) 등도 주목되는 작품입니다. 이밖에 ‘신라’를 소재로 한 한 이응노, 박대성, 배병우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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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신라의 현재적 의의  

  이 전시를 마무리하며 신라의 현재적 의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서 ‘신라’라는 국호에 주목합니다. 주지하듯 제22대 지증왕(재위 500~514) 때 확정된 ‘新羅’는 ‘德業日新 網羅四方’(덕업이 날로 새롭고, 사방을 망라하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덕업일신’은 바로 변화와 개혁 또는 혁신이며, ‘망라사방’은 세계화 또는 글로벌리제이션에 다름 아닙니다. 이처럼 ‘신라’는 오늘날에도 절대적으로 통용되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라’의 현재적 의의일 것입니다. 

  개관 70주년과 ‘실크로드 경주 2015’를 맞이하여 개최하는 이 특별전이 ‘신라’를 바탕으로 21세기 우리 문화를 융성케 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되새기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 자료출처 : 국립경주박물관(http://gyeongju.museum.go.kr/)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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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월성동 |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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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보물 제1758호 ‘포항 중성리 신라비’를 국보로 승격 예고하고, 기타 13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하였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 中城里 新羅碑)-(사진 : 문화재청)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 中城里 新羅碑)’는 2012년에 보물 제1758호로 지정된 현존 최고(最古)의 신라비이다. 이 비는 1면 12행에 모두 203자가 각자(刻字)되어 있으며, 신라 관등제의 성립 과정, 신라 6부의 내부 구조와 지방 통치, 분쟁 해결 절차, 궁(宮)의 의미, 사건 판결 후 재발방지 조치 등 신라의 정치·경제·문화상을 알려 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역사적·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비문의 글씨체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와 통하는 고예서(古隸書)로 신라특유의 진솔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단양적성비에서 보이는 고해서(古楷書)의 전초(顚草)이며 선구가 된다는 점에서 국보 제242호 울진 봉평리 신라비, 국보 제264호 포항 냉수리 신라비보다도 더욱 신라적 풍격을 보이고 있다. 이밖에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제작시기에서도 이미 국보된 지정된 지증왕 4년(503) 포항 냉수리 신라비, 법흥왕 11년(524) 울진 봉평리 신라비보다도 앞선 지증왕 2년(501)에 제작되어 국보로서 승격 가치가 있다.


‘금동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金銅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는 통일신라 46대 문성왕(재위 839~857)이 대중(大中) 3년(855)에 탑을 세우면서 납입한 금동판 형태의 발원문으로, 1824년에 경주 남산 창림사 삼층석탑이 도괴될 때 무구정광다라니경과 함께 발견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탑원기는 이미 발견된 금동염거화상탑지나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 등과 유사한 시기의 금속제 명문 자료로, 불교사는 물론 금속공예사, 서예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금동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金銅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사진 : 문화재청)


2014/09/12 - [경주문화유산답사/신라 천년 역사의 시작과 끝] - 창림사,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금동찰주본기(慶州 皇龍寺 九層木塔金銅刹柱本記)’는 통일신라 경문왕 11년에 왕의 명에 의해 황룡사의 구층목탑을 중수하면서 기록한 실물자료로, 구층목탑의 건립 과정과 중수 과정을 후대의 역사서가 아닌 중수 당시에 제작된 유물을 통해 생생히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 유행했던 탑지(塔誌)의 서술체계는 물론 서체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사리장치 품목과 안치장소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 탑파의 사리장엄 의식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사리함의 문비(門扉) 내․외면에 선각된 신장상은 절대연대(872년)를 가진 유품으로 불교조각사 연구에 기준이 된다.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금동찰주본기(慶州 皇龍寺 九層木塔金銅刹柱本記)-(사진 : 문화재청)


문화재청은 이번에 국보․보물로 지정 예고한 문화재 14건에 대하여 30일간의 지정 예고 기간을 거쳐 각계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할 예정이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http://www.cha.go.kr/)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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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효현리삼층석탑(慶州孝峴里三層石塔)
보물 67호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외와마을 입구에 있는 석탑으로 통일신라 9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통일 후 8세기까지 거대한 크기의 석탑들에 비해 그 규모가 많이 작아졌지만 신라석탑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탑몸돌)을 세웠는데 지붕돌 네 귀퉁이가 버선코와 같이 날렵하게 들려 있다. 통일신라 전성기의 석탑들은 지붕돌 받침이 보통 5단으로 되어 있는데, 이 탑의 지붕돌 받침은 4단으로 줄어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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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540) 가을 7월, 왕이 죽으니 시호는 법흥이라 하고, 애공사 북봉에 장사지냈다."-『삼국사기』신라본기
"가을 8월(576), 왕이 죽으니 시호를 진흥이라 하고 애공사 북봉에 장사지냈다."-『삼국사기』신라본기
"신유(661)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애공사 동쪽에 장사지내고 비석을 세웠다"-『삼국유사』권제1 기이 태종춘추공

탑이 세워져 있는 이 곳을『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각각 기록된 법흥왕과 진흥왕 그리고 태종무열왕의 무덤을 가리켜 주는 "애공사"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법흥왕릉이라고 전하는 무덤을 제외한 나머지 왕릉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애공사가 있었던 곳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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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선도동 | 경주효현리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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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에 있는 신라 제23대 법흥왕의 능이라고 전해오는 무덤이다. 경주의 서악이라 불리는 선도산 서쪽 기슭에서 뻗은 낮은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무덤의 내부구조는 알 수 없는데 겉모양은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원형봉토분이다. 삼국시대 신라 왕릉으로는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한다. 무덤의 아래쪽에는 냇돌로 쌓은 둘레돌(무덤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는 역할)이 드문드문 들어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법흥왕은 재위 27년에 죽으니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하였고,삼국유사에서도 왕의 능은 애공사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현재 이 무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라 말기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3층석탑이 있는데 애공사지탑(효현리 3층석탑)이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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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법흥왕릉(新羅法興王陵)
사적 176호

삼국사기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왕들의 능묘 위치를 살펴 보면 신라 22대 지증왕(500~514)까지는 오릉·미추왕릉·내물왕릉을 제외한 다른 왕들의 무덤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된 것이 없는데, 법흥왕 이후부터 신라 왕들에 대해서는 왕릉의 위치나 장례지가 주변에 있던 사찰을 중심으로 방위나 산 이름 또는 지역명 등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증왕과 법흥왕 사이를 경계로 한 이러한 기록상의 차이는 바로 왕릉들의 입지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신라고분은 6세기 초를 중심으로 그 이전까지는 평지에 돌무지덧널무덤이 축조되었으나, 그 뒤부터는 산기슭으로 옮겨지고 내부구조도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뀐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법흥왕릉 부터 시작되는 신라 왕릉의 소재지에 대한 기록은 바로 신라고분이 변화하는 과정을 문헌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법흥왕부터 신라의 왕들의 무덤이 평지에서 산지로 이동하는 것은 이 때 공인된 불교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도 보인다.

법흥왕은 신라 제23대 왕(재위 514540)으로 성은 김씨, 이름은 원종이며 지증마립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연제부인 박씨이고, 왕비는 보도부인 박씨이다. 키가 7척이나 되고 마음이 너그럽고 넓었으며 백성들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지증왕 때부터 시작된 정치 개혁을 이어 받아 신라를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로 완성시킨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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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년에 병부(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곳)가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왕을 중심으로 한 고대 국가 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권을 왕이 직접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520년에는 율령(형법과 법에 의한 명령)을 반포하고 백관(벼슬아치)공복(벼슬아치들이 조정에 나갈 때 입는 옷)을 정하였다.

531년에 상대등(지금의 수상과 같은 역할)을 설치하였는데 이찬(17관등 중 두 번째 관등) 철부가 최초의 상대등이 되었다.

법흥왕은 안으로 나라의 질서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밖으로는 영토 확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522년에 백제의 압박에 반발한 대가야 왕이 사신을 보내 결혼을 요청하자 왕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을 보내 결혼 동맹을 맺어 백제를 견제하였다. 그 뒤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추진하여 524년에는 남쪽의 국경 지방을 순수(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보살피며 돌아다니는 것)하고 영토를 개척하였다. 이 때 금관가야의 왕(김구해)이 와서 법흥왕을 만났으며 532년에 금관가야의 김구해 왕은 세 아들인 노종, 무덕, 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과 함께 신라에 항복함으로 합병되었다. 신라 일통삼한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되는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은 벼슬이 각간(17관등 중 첫 번째인 이벌찬)에 이른다.
금관가야의 항복으로 신라는 낙동강과 남해안의 요지인 김해를 발판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법흥왕은 왕권 강화 정책과 영역 확장 등을 통해 국력이 크게 오르자 536년에 신라 최초의 독자적 연호인 건원(建元)”을 사용하였다. 중국의 주변 국가들은 보통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는데 신라만의 독자적인 연호 사용함으로써 중국과 대등한 관계임을 드러낸 자주 의식의 표현이라는 데 역사적 의미가 있다.

521년에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이 때 신라에 사신으로 온 승려 원표로 인해 불교가 신라왕실에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불교가 신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5세기 초 신라 제19대 눌지마립간(417~458) 때이거나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로 보고 있다. 신라 제21대 소지마립간(479~500) 때 고구려에서 온 아도는 초기 신라불교의 개척자였다. 그는 묵호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자 3명과 함께 일선군(지금의 경북 선산) 모례(신라 최초의 불교신자)의 집에 숨어 살면서 일반 백성들에게 불교를 전하였다.

일반 백성들에게 전해진 불교는 신라의 귀족으로부터 배척 받았다. 법흥왕은 불교를 크게 일으키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고민하던 중 528년에 이차돈의 순교하면서 국가적 공인이 이루어졌다.

법흥왕은 말년에 승려가 되어 법호를 법공(또는 법운)이라 하였다. 재위 27(540) 만에 죽자 시호(지증마립간 때 처음으로 사용)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 북쪽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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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덕사지(望德寺址)
사적 7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낭산 남쪽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사천왕사 맞은편에 있는 절터이다. 지금 이 곳에는 금당, 강당, 동서목탑, 중문, 회랑 등의 건물터가 남아있고 절의 서쪽 편에는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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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덕사지 당간지주(望德寺址幢竿支柱)
보물 69호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문무왕 19(679)에 중국 당나라가 침입하자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예부시랑 악붕귀를 사신으로 보내어 이를 확인하려 하였다.
신라에서는 나라를 보호하는 사천왕사를 보여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여 사천왕사 남쪽에 따로 새 절을 지어 보여 주었다.

당나라 사신이 절 앞에 이르러 말하기를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亡德遙山)의 절이군요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신라 사람들이 황금 1,000냥을 주었더니 당나라로 돌아가서 신라에서는 천왕사를 지어 놓고 새 절에서 당나라 황제의 장수를 빌고 있습니다.”라고 거짓으로 보고 하였다.
이후 신라에서는 당나라 사신이 말한 망덕요산에서 그 뜻을 가져와 이 절을 망덕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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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절터로 선덕여왕의 무덤이 있는 낭산 남쪽 아래에 있다. 사천왕사(사적 8호)는 2006년 4월 부터 2011년 현재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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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 동쪽 귀부

이 절터에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탑 및 좌우경루의 건물터를 비롯하여 머리가 잘려 나간 귀부 2기와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그리고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천왕 전(벽돌)은 신라에서 조각으로 유명한 양지스님의 작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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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 서쪽 귀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절들은 모두 금당(부처님을 모신 건물) 앞에 3층 또는 5층탑 하나만을 세우는 일탑가람 형식이었으나, 통일 이후에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탑을 세우는 쌍탑가람 형식으로 바뀌었는데, 이 사천왕사가 쌍탑가람 형식의 최초의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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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 당간지주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제30대 문무왕 때 중국의 당나라가 백제 멸망 후에 설치한 웅진도둑부를 신라가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때 중국 당나라에 있던 의상스님이 급히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자, 문무왕은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스님은 낭산 아래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코앞에 닥치자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모자랐다. 명랑스님은 임시로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12명의 스님들과 더불어 문두루비법(불교의 교파 중 밀교에서 행하는 비법으로 불단을 설치하고 다라니 등을 외우면 국가적인 재난을 물리치고 국가를 수호하여 사회를 편안하게 할 수 있다고 함)을 사용하였다. 그러자 당과 신라 군사들이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거센 바람과 커다란 파도가 크게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 후 5년 만에 절을 완성(문무왕 19년 : 679)하고 사천왕사라고 하였다.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의 월명스님은 신라의 노래인 향가 도솔가제망매가를 지었는데, 이 곳 사천왕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월명스님은 피리를 잘 불었는데, 달 밝은 밤에 피리를 불면 그 소리에 지나가는 달이 멈출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신라 사람들은 월명스님이 살던 사천왕사 앞 동네를 월명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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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낭산 정상에 있는 선덕여왕의 무덤이다. 외부 모습은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2~3단으로 둘레돌(무덤의 가장자리 기슭에 돌아가면서 늘어놓은 돌로 무덤의 흙이 무너져 내리 것을 막는 역할을 함)을 쌓고 다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무덤이다.

선덕여왕은 신라 제27대 왕(632647)으로 성은 김씨, 이름은 덕만이다. 진평왕의 큰 딸로 어머니는 마야부인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 : 성스러운 여자 황제)”란 호를 올렸다. 신라에서 여자인 선덕여왕이 처음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성골이라는 특수한 왕족 신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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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선덕여왕릉(新羅善德女王陵)
사적 182호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미리 알아서 맞춘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첫 번째는 공주로 있을 때 당 태종이 보내온 모란꽃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향기가 없는 꽃임을 알아맞힌 것으로 『삼국사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평왕 때에 당나라에서 얻어 온 모란꽃 그림과 그 씨앗을 덕만에게 보였더니 "이 꽃은 아름답긴 하나 향기가 없습니다" 하였다. 왕은 웃으며 "네게 어떻게 아느나?" 하니 "이 꽃은 뛰어나게 곱지만 그림에 나비와 벌이 없으니 이는 반드시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 하였다. 그 씨앗을 심어보니 과연 덕만의 말과 같았다.

두 번째는 여근곡(경주시 건천읍 부산 골짜기)에 백제군이 몰래 잠입한 것을 미리 알고 군사를 보내 소탕한 일이다.
『삼국사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 5년(636), 여름 5월에 개구리 떼가 대궐 서쪽 옥문지에 모여드니 왕이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개구리의 불거진 눈은 병사들의 모습이다. 내 일찍이 들으니 서남 변방에도 옥문곡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혹 백제군이 몰래 그곳에 들어 왔는지 알 수 없다"하고 장군 알천을 시켜 가서 수색케 하였더니 백제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려고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그 곳에 숨어 있으므로 알천이 들이쳐 다 잡아 베었다.


세 번째는 자신이 죽는 날을 미리 알아맞힌 것이다.삼국유사』에 선덕여왕이 죽기 전에 남긴 유언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왕이 아무 병이 없을 때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죽을 것인데 나를 도리천에 묻어 달라.”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해 다시 물으니, 왕은 낭산 남쪽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과연 그날이 되자 왕이 죽었고, 신하들은 낭산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왕이 낭산 아래에 사천왕사를 세우자 비로소 사람들은 그 뜻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도리천이란 하늘은 사천왕이 다스리는 사왕천이란 하늘 위에 있는 것인데, 낭산 아래 세워진 사천왕사가 사왕천이란 하늘이고 바로 위 왕의 무덤이 있는 낭산 정산이 바로 도리천이란 하늘이기 때문이다.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16년 동안 신라를 다스린 선덕여왕은 분황사와 영묘사를 비롯하여 천문관측대인 첨성대를 세웠다. 그리고 끊임없이 신라를 괴롭히는 백제와 고구려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선덕여왕 말년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의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의 조카인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이 이를 막아냈지만 선덕여왕은 이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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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55대 경애왕(재위 924~927)의 능은 경주시 배동 서남산 삼릉계곡 입구에 있다. 무덤의 겉모습은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으로 주변에 별다른 장식이 없으며 왕릉으로는 작은 규모에 속한다.

경애왕의 성은 박씨, 이름은 위응으로 아버지는 신라 제53대 신덕왕(재위 912~917)이며 어머니는 의성왕후이다. 그리고 신라 제54대 경명왕(재위 917~924)의 동생이다.

경애왕이 왕위에 오르고 4년째 되는 해인 9279월에 고려와 싸움을 하던 후백제 견훤은 갑작스럽게 신라의 고울부(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로 쳐들어온다. 이때 왕은 고려 태조 왕건에게 구원군을 요청하지만 후백제 견훤의 군대는 같은 해 11월에 고려의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서라벌로 쳐 들어가 포석정에서 잔치를 하며 놀고 있던 경애왕을 잡아 스스로 자살케 하고 왕비를 욕 보였다. 그리고 신라의 마지막 왕이 되는 경순왕(재위 927~935) 김부를 왕위에 세우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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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애왕릉(사적 제222호)

『삼국유사』 김부대왕 조에 보면 경애왕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상황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정해(927년) 9월(음력)에 (후)백제 견훤이 신라에 침입해 고울부(지금의 영천시)까지 이르렀다. 경애왕이 우리 태조(왕건)에게 구원병을 청하자 장수에게 명해 날쌘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했다. 그러나 구원병이 미처 이르기 전 견훤은 11월에 서울로 쳐들어 갔다.
이때 왕은 비빈(임금의 부인), 종척(왕의 친척)들과 더불어 포석정에서 노닐며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견훤의 군사들이 들이 닥치는 것도 깨닫지 못하다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은 왕비와 함께 후궁으로 달려 들어가고 여러 신하들과 궁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히자 엎드려 기면서 노비라도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견훤이 군사를 풀어 재물을 약탈하고, 대궐로 들어가 자리를 정하고 좌우에게 명해 왕을 찾아내게 했다. 왕은 왕비 등 몇 사람과 함께 후궁에 숨어 있었는데
 (중략)  견훤이 협박해 스스로 자살하도록 하였다. 왕비를 범하고 부하들에게 후궁들을 짓밟게 했다  (중략)  왕(경순왕)이 견훤의 손에 의해 즉위된 뒤 전왕(경애왕)의 시체를 서당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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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경애왕을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고 나오는데 지금의 능에서 남산쪽으로 2km정도 되는 거리에 해목령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무덤을 경애왕릉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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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6대 지마이사금(재위 112~134)은 파사이사금의 아들로 왕비는 애례부인 김씨이며 갈문왕 마제의 딸이다. 삼국사기에는 태자 시절에 결혼하게 되는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23년간 재위에 있으면서 가야를 공격하고, 왜구와 말갈의 침입을 막았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남산자락에 있는 무덤은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원형봉토분으로 특별한 장식이 없으며 최근에 설치한 혼유석(영혼이 나와 노니는 곳)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지마이사금의 재위 기간 동안 유난히 자연재해가 많았음을 볼 수 있는데, 우박과 서리, 홍수와 태풍, 가뭄 그리고 일식, 지진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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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마왕릉 (祗摩王陵)
(사적 221호)

115, 봄 가야가 침범하자 왕은 직접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지금의 낙동강 하류)를 지나 가야를 공격하였는데, 가야 군사의 복병에게 포위를 당하는 곤경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듬해 가을 다시 가야를 공격하였으나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지키는 가야군의 방어와 비 때문에 군사를 되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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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년에는 말갈의 대부대가 대령책(지금의 대관령)을 넘어 쳐들어오자 백제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백제의 기루왕은 5명의 장군을 보내 도와주게 하여서 말갈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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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1220()부터 2012212()까지 특별전 고대의 문자를 읽다를 개최합니다.

이번 전시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하였던 문자, 그 이후특별전을 바탕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전시입니다. 고대의 문자를 살펴보면서 역사 자료로서의 의미와 그 맥락, 해석 등을 생각해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전시는 모두 4부로 구성됩니다1부 한자의 수용에서는 중국의 나라들과 갈등을 겪거나 교류하면서 한자를 접하기 시작하던 모습을 살펴봅니다고조선에서는 중국의 명도전반량전 같은 화폐와 명문 청동기 등을 받아들였습니다한반도 남부의 나라들은 낙랑군과 교류하면서 한자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변한 지배층의 무덤에서는 붓과 목간의 글자를 지우는 손칼 등이 출토됩니다. 

 

2통치의 기록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왕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이 문자를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였던 사실을 살펴봅니다. 문자의 사용으로 왕과 지배층의 결정과 명령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삼국은 국가체제를 완비하고 율령을 반포하여 통치의 기준과 근본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중요한 일들을 기록하고 새겨서 후대까지 전하였습니다. 그 실례의 하나로서, 2010년 이백여년만에 재발견되었던 문무왕비편이 공개됩니다.
 
3불교의 기록에서는 불교 유입과 동반하여 문자가 더욱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의 승려는 문자 기록의 한 축을 맡았습니다. 승려들은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고 사회에 알리는 구실을 하였습니다. 중국과의 외교 문서 작성이나 역사서 편찬에 참여하였던 승려들은 국제성을 갖춘 지식인이었습니다. 불교 수용과 함께 경전도 많이 유입되고 만들어졌습니다. 경전의 제작은 인쇄술의 발달로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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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기록
에서는 문자가 폭 넓게 활용되면서 생활과 관련된 기록들도 많이 남겨졌음을 살펴봅니다. 지금과 달리 종이는 매우 귀한 물품이었습니다. 일본 정창원에서 발견된 신라 문서는, 행정 문서로서의 기능을 다한 뒤 일본에 수출되는 경전과 기물의 포장재로 재활용되었습니다. 일반적인 내용을 기록할 때에는 종이 보다 나무를 깎아 만든 목간을 더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목간에는 고대인의 생활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 외에도 기와에 새겨진 왕궁이나 사찰의 이름, 토기 등에 적혀진 명문 등 다양한 문자에서 그 사용처와 용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이번 특별전은, ‘고대의 문자를 읽다라는 제목처럼, 옛사람들의 문자 속에 담겨 있는 생각을 읽어내고자 했습니다. 문자는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료출처 :  http://gyeongju.museum.go.kr/ 
-보다 자세한 내용은 :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054-740-7602)로 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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