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6대 지마이사금(재위 112~134)은 파사이사금의 아들로 왕비는 애례부인 김씨이며 갈문왕 마제의 딸이다. 삼국사기에는 태자 시절에 결혼하게 되는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23년간 재위에 있으면서 가야를 공격하고, 왜구와 말갈의 침입을 막았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남산자락에 있는 무덤은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원형봉토분으로 특별한 장식이 없으며 최근에 설치한 혼유석(영혼이 나와 노니는 곳)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지마이사금의 재위 기간 동안 유난히 자연재해가 많았음을 볼 수 있는데, 우박과 서리, 홍수와 태풍, 가뭄 그리고 일식, 지진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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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마왕릉 (祗摩王陵)
(사적 221호)

115, 봄 가야가 침범하자 왕은 직접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지금의 낙동강 하류)를 지나 가야를 공격하였는데, 가야 군사의 복병에게 포위를 당하는 곤경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듬해 가을 다시 가야를 공격하였으나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지키는 가야군의 방어와 비 때문에 군사를 되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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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년에는 말갈의 대부대가 대령책(지금의 대관령)을 넘어 쳐들어오자 백제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백제의 기루왕은 5명의 장군을 보내 도와주게 하여서 말갈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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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부장 ibuzang

신라 제7대 일성이사금(재위 134~154)의 무덤이다. 유리이사금의 큰아들(갈문왕* 일지의 아들이라고도 함)로 왕비는 지소례왕의 딸인 박씨이다.

경주 남산 서쪽 기슭에 있는 무덤은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원형봉토분으로 특별한 장식이 없다. 무덤의 밑 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돌려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였다. 무덤 앞의 2단의 축대는 경내를 보호하기 위해 최근에 만든 것이다.

20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북쪽 변방을 침입하는 말갈인들을 막아냈고, 농토를 크게 넓히고 제방을 쌓는 등 농업을 권장하였다. 백성들에게는 금, , 보석의 사용을 금지하여 사치를 부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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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일성왕릉(新羅逸聖王陵)
(사적 173호)


『삼국사기』권 제1 「신라본기」제1 일성이사금 조를 보면 백성을 사랑한 왕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11년(144) 봄, 영을 내려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밥먹기는 오로지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것이니 여러 주군은 제방을 수리하고 농토를 널리 개척하라"하였고 또 "민간에서 금은주옥을 사용 못하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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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서는 혁거세거서간부터 지증마립간에 이르기까지 네 가지의 왕 명칭을 사용하였다. 거서간을 사용한 왕이 한 분, 차차웅을 사용한 왕이 한 분, 유리왕부터 흘해왕까지 이사금을 사용한 왕이 열네 분, 내물왕부터 지증왕까지 마립간을 사용한 왕이 여섯 분이다. 22대 지증왕부터 중국식인 왕()이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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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서간은 불구내, 즉 태양, 귀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차차웅은 자충 또는 무당을 이르는 말로 존장자를 뜻한다. 이사금은 이의 수가 많고 적음을 뜻하는 잇금이란 말로 연장자를 뜻한다. 마지막으로 마립간은 말뚝을 일컫는 말로 대수장 또는 대군장을 뜻한다. 이렇듯 고대 신라는 고유한 우리말로 왕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갈문왕 : 신라가 왕을 추봉하는 경우에는 모두 갈문왕이라고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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