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옛 수도였던 경주시의 남쪽을 둘러싸고 경주평야의 남북으로 솟아 오른 불교문화유적이 많기로 유명한 산이다. 경주평야의 주위에는 서쪽에 선도산, 동쪽에 낭산과 명활산, 북쪽에 금강산 등 많은 산들이 성벽처럼 둘러서 있는데 그 중에 남쪽으로 높게 솟은 산이 남산이다.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 두 봉우리 사이를 잇는 산들과 계곡 전체를 아울러 남산이라고 한다. 제일 높은 봉우리인 금오봉의 높이는 468m이고, 남북의 길이는 약 8, 동서의 너비는 약 4이다. 남산의 지세는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뉜다. 동남산 쪽은 가파르고 짧은 반면에, 서남산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긴 편이다.

동남산과 서남산에는 각각 16개의 계곡이 있고, 남쪽의 2개와 합하여 모두 34개의 계곡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유적의 숫자로 보면 서남산 쪽이 동남산보다 월등히 많은데, 이 계곡들에는 석탑·마애불·석불·절터 등이 널려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절터는 112곳이며, 탑은 61기이고, 불상은 80여체를 헤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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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산에서 바라본 경주 시가지 전경

61기를 헤아리는 석탑 중에는 높이가 7m 가량 되는 큰 것, 5~6m 되는 것, 3~4m 정도의 작은 것들이 있는데 그중 중간 것이 제일 많다. 평지에 세워진 절은 보통 법당 앞에 탑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남산에 세워졌던 절의 탑들은 법당의 위치와 상관없이 대개 보기 좋은 바위 봉우리 위에 세워졌다.

남산의 불상들을 살펴보면 입체로 된 것이 29체이고 바위 면에 새긴 마애불상이 51체이다. 큰 것은 10가량 되는 것도 있지만 보통 4~5m 되는 것이 많다. 또 작은 것은 1m 정도 되는 것도 있다. 부처골 감실여래좌상이나 배리삼존불, 장창골삼존불처럼 6세기말~7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도 있고, 삼국의 통일을 기원하여 조성한 탑골부처바위도 있으며, 통일된 나라의 영광을 위해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칠불암불상군도 있다.

그리고 왕정골 여래입상이나 삿갓골 여래입상처럼 우리 민족예술의 황금시대인 8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도 있다. 또 보리사 여래좌상처럼 화려하고 섬세하던 8세기말 내지 9세기 초반의 것도 있고, 9세기 중엽의 것들도 있어 수백 년 이어온 신라 불교미술의 흐름을 이곳에서 모두 볼 수 있다.

남산에 마애불상이 많은 것은 우리 조상들이 불교수입 이전부터 믿어온 바위신앙이 불교신앙과 합쳐진 우리 불교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바위 속에 신령스러운 힘이 있다고 믿어온 신라 사람들은 불교가 들어온 뒤 바위 속에 부처가 있다고 믿게 되어 많은 마애불상을 만들었다. 냉골 마애대좌불은 머리는 입체에 가까운 조각인데 비해 몸체는 바위 위에 선각으로 되어 있다. 몸체가 반 자연·반 인공으로 되어 불상이 바위 면에서 튀어나오지 않고 예배하는 사람의 마음을 바위 속으로 이끌어 부처의 영에 예배하도록 되어 있다. 냉골 석가여래삼존상이나 아미타여래삼존상(보통 선각육존불이라고 함)은 다듬지 않은 바위 면에 새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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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산 냉골 마애대좌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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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산 냉골 선각육존불

남산에는 신라 제26대 진평왕(579~632) 때 쌓은 남산신성이나 고허성 같은 국방시설의 터도 남아 있다. 남산신성 터 안에는 2곳의 무기 창고터와 1곳의 식량 창고터가 남아 있는데 식량 창고터의 길이는 100m이며, 지금도 비가 오면 탄화된 쌀알들이 발견된다. 무기창고도 길이 50m가 넘는 큰 건물이었는데 모두 밑으로 바람이 통하는 다락식 건물이었다.

또한 남산은 신라 사영지(청송산, 피전, 금강산) 가운데 한 곳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화백회의)을 갖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첫 왕인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 남산 기슭의 나정이며, 불교가 공인된 528(법흥왕 15) 이후 남산은 부처님이 항상 계시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높이 받들어져 왔다.

신라 제49대 헌강왕 때 남산의 산신이 나타나 나라가 멸망할 것을 미리 알려 주었다는 이야기가『삼국유사』전해져 온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한 어느 날,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 사람들은 보지 못하였으나 왕만이 홀로 이것을 보았다. 왕은 스스로 춤을 추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그 형상을 보였던 것이다. 산신은 나라가 장차 멸망할 줄 알았으므로 춤을 추어 그것을 경고했던 것이나,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날 조짐)가 나타났다고 하여 방탕한 생활이 더욱 심해졌던 까닭에 신라는 마침내 신라 55대 왕인 경애왕이 이곳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치욕을 당하고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나라를 바치면서 멸망하였다고 한다. 경주 남산은 신라 천년 역사의 시작을 함께하였으며, 신라의 마지막을 말없이 지켜본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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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의 능이다.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으로 무덤 주위에는 무덤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둘레돌을 돌렸다. 무덤 앞에 있는 귀부(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위에 얹혀 있는 이수(비석의 맨 윗부분을 장식하는 머릿돌로 보통 용 문양을 새겨둔다)의 앞면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새겨진 글귀로 인해 신라시대 왕들의 무덤 중 그 주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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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무열왕릉(新羅武烈王陵)
(사적 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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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의 이름은 춘추(春秋)로 신라 제25대 진지왕(재위 576~579)의 아들인 이찬(신라 17관등 중 두번째, 이척찬이라고도 함) 용춘(또는 용수)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신라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인 천명부인이다. 왕비는 문명부인으로 각찬(신라 17관등 중 첫번째, 이벌찬이라고도 함) 김서현의 딸로 김유신 장군의 누이동생인 문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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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태종무열왕릉비(新羅太宗武烈王陵碑)
국보 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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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비석 머릿돌) 앞면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3마리씩 6마리의 용이 뒤엉켜 있으며, 용이 받들고 있는 여의주 아래쪽에 "太宗武烈大王之碑"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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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 뒷면(중앙에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모습)

(조선시대 이우라는 사람이 쓴 『대동금석서속』이란 책에 이 비석에 새겨진 글을 쓴 사람이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왕은 의표(생각하는 것)가 영특(남달리 뛰어나고 훌륭함)하여 어려서부터 세상을 바로잡을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라 제28대 진덕왕(재위 647~654)을 섬겨 벼슬이 이찬에 이르렀다고 한다. 진덕여왕이 죽고 난 뒤에 성골출신으로 왕위에 오를만한 남자가 모두 없어지자 여러 신하들이 다음 왕위에 오를 사람으로 진골출신이자 상대등(신라시대 최고의 관직으로 법흥왕 때 처음 설치됨)인 알천(신라의 진골귀족이며 장군으로 선덕여왕 때 여근곡에 침입한 백제의 장군 우소의 군대를 모두 물리쳤다. 비담과 염종의 반란이 진압된 뒤 상대등이 되었다)을 지목하였지만 알천은 "나는 나이도 이미 늙었고 이렇다 할 덕행도 없으니, 지금 덕망이 융숭한 춘추공 같은 이는 실로 세상을 바로잡을 영걸이라 할 수 있다."고 사양하고 춘추를 지목하였다. 김춘추는 세 번이나 간곡하게 사양하다가 왕위에 오르니 52세의 늦은 나이로 신라 진골 출신의 첫 왕이 되었다.

642(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1)에 백제 의자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로 쳐들어와 신라의 40여개 성을 쳐서 빼앗고, 그해 8월에 장군 윤충을 보내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을 함락시켰다. 이곳의 성주는 이찬 품석(김춘추의 사위)으로 성이 함락되었을 때 아내와 함께 죽었다『삼국사기기록을 보면 딸과 사위의 죽음을 전해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어 하루 종일 눈 한번 깜박이지 아니하더니 이윽고 하는 말이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못 없앤단 말이냐하고, 선덕여왕에게 나아가 신은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고야 말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했지만 당시 고구려의 실권자인 연개소문은 이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에 김춘추는 신라 제28대 진덕여왕(재위 647~654)2(648)에 사신으로 당나라로 건너가서 당태종 이세민을 만나 나당동맹을 이끌어 내게 된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고 7년 째 되는 해인 660년 이찬 김유신을 승진시켜 상대등으로 삼고 백제를 멸망시킬 준비를 마친다. 같은 해 3월 당 고종은 소정방과 김인문(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을 장수로 삼아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게 한다. 같은 해 5월 태종무열왕은 김유신과 함께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떠나 6월에 남천정(지금의 경기도 이천군)에 도착하여 소정방의 군대를 기다린다.

중국 산둥반도(산동성)에서 출발한 당나라 군대는 황해를 건너와 7월에 덕물도(지금의 인천시 옹진군 덕적도)에 도착하여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태자인 법민(신라 제30대 문무대왕)과 만나 백제를 정벌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710일에 사비(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두 나라 군사가 만나 함께 백제의 도성을 치기로 약속한다.

소정방과 김인문의 13만 군대는 기벌포(지금의 금강 하구)에 도착하여 백제군을 크게 무너뜨리고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에 먼저 도착하였다. 태종무열왕의 명을 받은 김유신은 5만 군사를 이끌고 황산벌(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로 나가니 백제 장군 계백이 이끄는 5천 군사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신과 계백은 모두 네 번을 싸웠지만 승패를 결정짓지 못했다. 이때 화랑 반굴과 관창이 각각 혼자 백제군 진영으로 들어가 힘껏 싸우다 죽었는데, 이것을 보고 분노한 신라 군사들의 총공격에 계백을 비롯한 백제군은 전멸한다.

660712일에 나당연합군이 함께 만나 사비성을 포위하자 다음날 백제 의자왕은 신하들과 함께 밤에 도망하여 달아나 웅진성(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으로 피신한다. 사비성을 지키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이 먼저 항복하고 5일 뒤에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멸망하고 만다.

같은 해 11월 백제로부터 돌아온 태종무열왕은 백제정벌에서 전사한 자들과 전공을 세운 자들에게 상을 내려주었다. 661, 왕위에 오른 지 8년 만에 죽으니 나이 59세였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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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25대 진지왕(재위 576~579)의 능으로 전해지는 무덤으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원형 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무덤을 보호하는 둘레돌을 갖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몇 개만 드문드문 보이고 있다.
현재 학자들 중 일부는 진지왕의 무덤이 이곳이 아니라 경주시 서악동 태종무열왕릉 뒷편에 있는 4기의 무덤 가운데 아래쪽에서 두번째 무덤을 진지왕릉으로 보기도 한다.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일찍 죽은 동륜태자의 동생이다. 이름은 사륜 또는 금륜이며 어머니는 사도부인(성은 박씨. 모량리 각간 영실의 딸)이며 비는 지도부인(성은 박씨, 기오공의 딸)이다.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이 일찍 죽었고 그 아들인 백정(신라 제26대 진평왕)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진흥왕의 뒤를 이어 둘째로서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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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진지왕릉(新羅眞智王陵)
(사적 1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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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악리고분군(사적 1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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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산에서 바라 본 서악리고분군(사적 142호)

진지왕은 왕위에 오른 후 바로 이찬(신라 17관등 중 두번째) 거칠부를 상대등(신라 최고의 관직으로 법흥왕 때 처음 설치됨)으로 삼고 나라의 일을 맡겼다. 577년 겨울 10월에 백제가 신라의 서쪽 국경을 침범하자 이찬 세종을 보내어 일선군(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북쪽에서 백제군을 물리치고 내리서성을 쌓아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578년에 중국 남조의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유지하였고, 백제의 알야산성(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을 공격하였다.

579년에 백제는 웅현성(지금의 충정북도 보은군으로 추정)과 송술성을 쌓아 2년 전에 신라에서 쌓은 내리서성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진흥왕 때 백제 제26대 성왕(재위 523~554)의 전사로 인해 나제동맹이 깨지면서 백제는 신라를 끊임없이 공격하게 된다. 진지왕 때부터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때까지 백제의 적극적인 공격으로 인해 신라는 나라가 흔들릴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진지왕은 재위 4년 째인 579년 가을 7월 17일에 죽으니 시호를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 지냈다.

『삼국사기』에는 진지왕의 짧은 재위기간 중 특별한 일이 없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나라를 다스린 4년만에 정치가 어지럽고 진지왕이 음란한 짓에만 빠져 있으서 나라 사람들이 그를 내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통삼한 이전 신라의 최전성기를 연 위대한 영웅 진흥왕의 아들이었지만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되는 비운의 왕이 되었다.

『삼국유사』에 진지왕이 쫓겨나게 되는 이유가 되는 특이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사량부에 사는 절세미인인 도화랑(도화녀)을 사모하여 궁중에 불려 들이려고 하였으나 도화녀는 남편이 아직 살아있다며 왕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진지왕은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고 하였는데 도화랑이 "그러면 괜찮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 왕위에서 쫓겨나 죽은지 2년 후 도화랑의 남편이 죽자 열흘 뒤 진지왕이 한밤중에 영혼으로 찾아와 도화녀와 사랑을 나누고 비형랑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진지왕의 아들은 용수(또는 용춘)이며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이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 왕위에 있었고, 폐위되어 쫓겨났지만 신라 일통삼한의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태종 무열왕계의 시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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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낭산 정상에 있는 선덕여왕의 무덤이다. 외부 모습은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2~3단으로 둘레돌(무덤의 가장자리 기슭에 돌아가면서 늘어놓은 돌로 무덤의 흙이 무너져 내리 것을 막는 역할을 함)을 쌓고 다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무덤이다.

선덕여왕은 신라 제27대 왕(632647)으로 성은 김씨, 이름은 덕만이다. 진평왕의 큰 딸로 어머니는 마야부인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 : 성스러운 여자 황제)”란 호를 올렸다. 신라에서 여자인 선덕여왕이 처음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성골이라는 특수한 왕족 신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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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선덕여왕릉(新羅善德女王陵)
사적 182호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미리 알아서 맞춘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첫 번째는 공주로 있을 때 당 태종이 보내온 모란꽃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향기가 없는 꽃임을 알아맞힌 것으로 『삼국사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평왕 때에 당나라에서 얻어 온 모란꽃 그림과 그 씨앗을 덕만에게 보였더니 "이 꽃은 아름답긴 하나 향기가 없습니다" 하였다. 왕은 웃으며 "네게 어떻게 아느나?" 하니 "이 꽃은 뛰어나게 곱지만 그림에 나비와 벌이 없으니 이는 반드시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 하였다. 그 씨앗을 심어보니 과연 덕만의 말과 같았다.

두 번째는 여근곡(경주시 건천읍 부산 골짜기)에 백제군이 몰래 잠입한 것을 미리 알고 군사를 보내 소탕한 일이다.
『삼국사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 5년(636), 여름 5월에 개구리 떼가 대궐 서쪽 옥문지에 모여드니 왕이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개구리의 불거진 눈은 병사들의 모습이다. 내 일찍이 들으니 서남 변방에도 옥문곡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혹 백제군이 몰래 그곳에 들어 왔는지 알 수 없다"하고 장군 알천을 시켜 가서 수색케 하였더니 백제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려고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그 곳에 숨어 있으므로 알천이 들이쳐 다 잡아 베었다.


세 번째는 자신이 죽는 날을 미리 알아맞힌 것이다.삼국유사』에 선덕여왕이 죽기 전에 남긴 유언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왕이 아무 병이 없을 때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죽을 것인데 나를 도리천에 묻어 달라.”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해 다시 물으니, 왕은 낭산 남쪽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과연 그날이 되자 왕이 죽었고, 신하들은 낭산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왕이 낭산 아래에 사천왕사를 세우자 비로소 사람들은 그 뜻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도리천이란 하늘은 사천왕이 다스리는 사왕천이란 하늘 위에 있는 것인데, 낭산 아래 세워진 사천왕사가 사왕천이란 하늘이고 바로 위 왕의 무덤이 있는 낭산 정산이 바로 도리천이란 하늘이기 때문이다.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16년 동안 신라를 다스린 선덕여왕은 분황사와 영묘사를 비롯하여 천문관측대인 첨성대를 세웠다. 그리고 끊임없이 신라를 괴롭히는 백제와 고구려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선덕여왕 말년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의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의 조카인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이 이를 막아냈지만 선덕여왕은 이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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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의 능으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아래쪽 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무덤의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 쌓은 돌)을 둘렀는데지금은 몇 개만 남아 있다.

진평왕의 성은 김씨이며이름은 백정이다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이며왕비는 마야부인이다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신기하고 키가 크고똑똑했다고 한다작은 아버지인 진지왕이 화백회의(신라 때에,진골 이상의 귀족들이 나라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던 회의 제도로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찬성해야 중요한 내용이 통과되는 만장일치제임)에 의해 왕에서 쫓겨나자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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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평왕릉(新羅眞平王陵)
사적 180호

진평왕은 56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왕권을 굳게 세우기 위해 새로운 중앙 행정부서들을 만들었다. 관리들의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 배를 관리하는 선부서, 나라의 세금을 관리하는 조부, 수레나 가마를 관리하는 승부, 문화와 교육 및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영객부 등을 만들었다.

진평왕은 건복(建福)”이라는 독자적인 연호(군주국가에서 왕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던 기간 동안 사용하던 칭호, 중국에서 시작됨)를 사용하였으며, 중국에서 발달한 불교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원광법사를 비롯한 많은 승려들을 유학 보냈다.

이때는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많은 침입을 받았는데, 중국의 수,당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어 두 나라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삼국유사』제2 기이, 천사옥대(하늘이 옥띠를 내리다)편을 보면 진평왕의  특이한 외모와 하늘이 내려 준 옥으로 만든 허리띠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전하고 있다.

…내제석궁(왕이 창건한 천주사라는 절)에 거둥하면서 돌다리를 밟자 돌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어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보이라."…(중략)…즉위 원년에 천사가 대전 뜰에 내려와 왕에게 말했다. "옥황상제께서 내게 명해 이 옥띠(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전해드리게 하셨습니다." 왕이 친히 꿇어앉아 받은 뒤에 사자는 하늘로 올라갔다. 큰 제사 때에는 왕이 반드시 이 띠를 둘렀다

신라에는 세 가지 진기한 보물이 전해져 내려 오는데, 진평대왕의 천사옥대와 황룡사의 장륙존상, 그리고 황룡사의 9층목탑이다. 이것들로 인해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신라를 침범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때 진평대왕의 천사옥대를 태조(왕건)에게 받쳤다고 하며, 황룡사의 장륙존상과 9층목탑은 몽골의 침입 때 불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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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삼랑사지당간지주(慶州三郎寺址幢竿支柱 )
(보물 127호)

절에서 여러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사찰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이 깃발을 매달아 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의 좌우에 세워 단단히 지탱해 주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 지주는 높이 3.7m로 가장자리를 따라 종선문(縱線文)이 양각되어 있고, 그 중앙에 세로로 아래 위에 능선이 조식되었다. 꼭대기에서는 바깥쪽으로 반원형의 선이 흘러내리다가 한 단의 굴곡을 이루고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삼랑사는 신라 진평왕 19년(597)에 처음 건립되어 역대 왕들의 행차가 잦았던 이름 높은 절이었으나 지금은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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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성건동 | 삼랑사지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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