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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탄사지 삼층석탑(味呑寺址三層石塔)

비지정문화재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 남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탑 앞쪽에는 석등 석재가 일부 남아 있다.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 미탄사에 관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최치원은 본피부 사람이다.지금도 황룡사 남쪽 미탄사 남쪽에 옛 터가 남아 있는데 여기가 바로 최후(최치원)의 옛집이 분명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내용을 근거로 하여 현재 이곳을 미탄사로 추정하고 있다.


1980년 경주시에서 국립경주박물관에 발굴조사를 의뢰하여 30일간 조사 후 현재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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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석탑 앞에 남아있는 석등 조각물의 일부


최근에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시행한 "2014년도 중요 폐사지 시발굴조사 사업"을 통해 미탄(味呑)이라는 글자가 적힌 기와를 발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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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월성동 | 미탄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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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부장 ibuzang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24대 진흥왕의 능이다. 외부모습은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원형봉토분으로 아래쪽에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무덤을 보호하는 둘레돌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나 지금은 몇 개밖에 보이지 않는다.
삼국통일 이전 신라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의 능으로서는 규모가 아주 작은 편에 속한다.『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법흥왕과 같은 위치에 있어야 하는데 반대방향으로 2㎞ 떨어져 있다. 때문에 서악동에 있는 서악리고분 4기 가운데 아래에서 세 번째 무덤을 진흥왕릉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진흥왕은 신라 제24대 왕(재위 540∼576)으로 성은 김씨, 이름은 삼맥종 또는 심맥부이다. 지증마립간의 손자로, 법흥왕의 아우 입종갈문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씨이며, 왕비는 박씨로 사도부인이다.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왕태후 김씨(법흥왕비)가 섭정(군주국가에서 새로 즉위한 왕이 어리거나 국가가 어려울 때, 왕 대신 국정을 처리하던 일이나 사람을 일컫던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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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흥왕릉(新羅眞興王陵)
사적 1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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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악동고분군(사적 142호)
(태종무열왕릉 뒷편에 있는 4기의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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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산에서 바라 본 서악동고분군(사적 142호)

551년(진흥왕 12)에 "개국(開國)"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직접 통치를 시작하면서부터 영토확장을 위한 적극적인 대외정복사업을 벌여 나갔다.

550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지금의 충청남도 천안 또는 증평)과 금현성(지금의 충청남도 전의)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틈을 타 이듬해 병부령 이사부(신라의 장군이자 정치가, 내물마립간의 4대손으로 지증마립간 때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정복함)로 하여금 두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이것을 기반으로 백제 제26대 성왕(523~554)과 연합해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공격하여 백제가 한강 하류 지역을 되찾도록 도왔다.


진흥왕은 거칠부(신라의 장군이자 재상, 내물마립간의 5대손, 진지왕 때 벼슬이 상대등에 이름)와 8명의 장군에게 명하여 한강 상류유역인 죽령 이북 고현(지금의 철령) 남쪽의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았으며, 553년에는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를 기습 공격해 한강하류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 전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 신주를 설치하고, 아찬(17관등 중 6번째로 아척간이라고도 함) 김무력을 초대 군주(신라시대의 지방 관직. 지방 행정 구역인 주(州)의 장관이다. 지증마립간 때 처음으로 신설됨)로 임명하였다.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유역을 빼앗으면서 백제와 맺은 나제동맹이 깨지게 되는데 백제 성왕은 554년 대가야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전투에서 오히려 신주 군주 김무력의 부하인 삼년산군(지금의 충청북도 보은)출신의 도도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며서 백제군은 거의 전멸하였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인적·물적 자원의 획득 외에도 황해를 통한 중국과 직접 외교를 할 수 있는 교통로를 확보하였다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법흥왕의 가야에 대한 정복사업을 이어 받아 낙동강유역에까지 진출하기 시작하여 555년에는 비사벌(지금의 경상남도 창녕)에 완산주가 설치되었다. 이것을 통해 이전의 어느 시기에 아라가야(지금의 경상남도 함안)비화가야(지금의 경상남도 창녕)지방이 신라에 의하여 점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와 연합했던 대가야는 사실상 신라의 영향력 아래 있었는데  562년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대가야는 신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사부와 그의 부장 사다함이 무력으로 정복하여 멸망시켰다. 이후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고 낙동강유역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밖에도 동북쪽으로 북상해 556년에 비열홀주(지금의 함경남도 안변)를 설치하고 이곳을 근거로 하여 568년 이전 어느 시기에는 함흥평야까지 진출한 듯하다. 이와 같은 고구려·백제·가야에 대한 활발한 정복을 통해 신라는 삼국통일 이전에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현재 전하고 있는 창녕척경비(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북한산순수비(서울시 종로구)·황초령비(함경남도 함주군 하기천면과 장진군 신남면 사이에 있는 고개)·마운령비(함경남도 이원군 동면과 단천군 부귀면 사이에 있는 고개)등 4개의 순수관경비(진흥왕순수비)와 단양적성비(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하방리)가 진흥왕의 영토 확장에 대한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다. 4개의 순수비 중 북한산에 세워져 있는 북한산비는 세워진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진흥왕의 순수관경비는 새로이 신라 땅이 된 지역 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확장된 영토를 확인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진흥왕은 국내 정치에 있어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545년 이찬(17관등 중 2번째로 이척찬이라고도 함)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아찬(17관등 중 5번째) 거칠부로 하여금『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또한 법흥왕에 의해 공인된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여 544년에 흥륜사를 완성하고, 553년에는 월성 동쪽에 왕궁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나자 왕궁을 고쳐서 절로 삼고 566년에 황룡사를 완공하였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로서 이곳에는 574년에 신라 최대의 불상인 장륙존상이 만들어져 모셔졌다.

이와 같이 진흥왕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누구에게나 제 집을 떠나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고, 그 자신도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법호를 법운이라 하여 여생을 마쳤다. 왕비도 이를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거처하다가 614(진평왕 36)에 죽었다.

진흥왕의 많은 업적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화랑도인데, 576년에 여성이 우두머리로 있는 원화를 없애고 남성을 우두머리로 한 화랑도를 만들었다. 기록상으로는 576년에 화랑도가 만들어진 듯하지만, 실제로는 진흥왕 초기에 이미 화랑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562년 대가야 정벌에 큰 전공을 세운 사다함이 유명한 화랑이었다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진흥왕이 원화를 없애게 된 이유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원화를 받들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임금이나 신하가 모두 사람을 알 수 없음을 고민한 나머지 끼리끼리 떼지어 놀게 하고 그 속에서 행동을 관찰하여 뽑아 쓸 셈으로 미녀 남모와 준정 두 사람을 간택하여 그녀들을 중심으로 무리 300여 명을 모이게 하였다. 남모와 준정이 서로 경쟁하고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꾀어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강물에 던져 죽여 버렸다. 이로 인하여 준정도 사형에 처하게 되니 무리들이 화목을 상실하여 원화제도를 없앴다._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진흥왕 37년

『삼국유사』에는 풍월도 즉 화랑의 우두머리가 국선이라는 것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여러 해 뒤에 왕이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먼저 풍월도를 숭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명령을 내려 양가의 남자 가운데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원화라는 이름을 고쳐 화랑이라고 했다. 처음으로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을 삼았으니, 이가 바로 화랑 국선의 시초이다.

김대문의『화랑세기』에는 "어진 재상과 충신들이 화랑에서 나왔고 뛰어난 장수와 용맹한 군사들이 모두 여기서 나왔다"고 했으며, 신라 말기의 뛰어난 학자였던 최지원의『난랑비서』에 "나라의 현묘한 도가 있으니 그 이름이 풍류도인데 그 핵심이 유불선(유교, 불교, 도교) 3교를 포함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진흥왕은 대내외적으로 수많은 업적을 남긴 신라 중흥의 군주였다
.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주의식의 상징적 표현이었던 독자적 연호를 3개나 사용할 수 있었다. 551년의 개국, 568년의 대창(大昌), 572년의 홍제(鴻濟)가 그것이다. 재위 37년만인 57643세로 죽자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

Posted by 이부장 ibuzang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신라를 세우고, 일구고, 가꾼 역사상의 인물들을 되돌아보는 신라 역사 인물 특별전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전시로 2010년에는 원효대사전을 개최한 바 있습니다. 올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까지 문명(文名)을 떨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미상) 특별전을 개최합니다




최치원은 신라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학자이며 사상가이고 관료였습니다. 그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당나라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게 된 최치원은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 <격황소서(檄黃巢書, 당나라 때에 있었던 유명한 민란인 황소(黃巢)의 난 때 그 괴수 황소에게 항복을 권유하기 위하여 보내는 격문을 대필한 것)>를 지으면서 그의 문명(文名)을 널리 떨치게 됩니다.

885년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왕실에서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등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894년에는 신라의 개혁을 위해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를 지어 진성여왕에게 올렸으며, 진성여왕은 이를 받아 들여 최치원을 6두품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인 아찬(阿湌, 신라 17관등 중 여섯번째로 아척간이라고도 함, 신라 육두품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관등)에 제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시무10여조>는 진골 세력 등의 반발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였고, 이는 최치원이 세속을 떠나 은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최치원은 정치적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학문은 다양한 방면에서 뛰어나 후세에 모범이 되었습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문인들은 그를 동방의 문종(文宗, 문장이나 문학의 대가를 일컫는 말)으로 추앙하고, 기리는 글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최치원의 여러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들을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최치원이라는 인물을 조명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전시는 1부 청운의 꿈을 품다, 2부 세상에 문명을 떨치다, 3부 서책으로 베개를 삼고 풍월을 읊다, 4부 최치원을 추억하다 등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Canon | Canon EOS-1Ds Mark III

계원필경, 최치원(857~?), 1918년, 29.2X20.0cm, 목활자본, 개인(사진 : 국립경주박물관)


최치원의 대표적 저술인계원필경(886년(정강왕 1) 그의 나이 서른살이 되던 해에 당나라에 있을 때의 작품을 간추려 정강왕에게 바친 문집)을 비롯하여 <사산비명(지리산의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 만수산의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초월산의 숭복사지비(崇福寺址碑), 희양산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등 4명의 승려를 위한 비문)> 탁본 등 100여점이 선보입니다. 이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최치원 진영(崔致遠眞影)>은 보존처리를 마친 뒤 처음으로 공개됩니다. 이 밖에도 김종직(1431~1492), 남효온(1454~1492), 이황(1501~1570), 김창협(1651~1708) 등의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문집도 눈여겨 볼 만합니다.


최치원 진영, 조선시대, 117.8X76.5cm, 견본채색, 국립중앙박물관(사진 : 국립경주박물관)


이번 전시가 천여 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주옥같은 글을 남긴 고운 최치원 선생과 대화하는 뜻깊은 자리가 되길 기대합니다.

 


- 전시 기간: 2012. 9. 18.() ~ 11. 18.() *월요일 휴관/ 101일은 개관, 2일 휴관

- 전시 장소: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

- 기념 강연회: 2012.10.27. 15/ 동국대 김복순 교수/ 최치원의 저술과 사상


이 보도 자료와 관련하여 더욱 자세한 내용이나 취재를 원하시면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 배영일(054-740-7533)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자료출처 : 국립경주박물관 보도자료(http://gyeongju.museum.go.kr/)




읽어보면 좋은 글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신라유학생 최치원이 멘붕에 빠진 까닭, 경향신문 기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6062106545&code=990100)

※ 2012년 9월 6일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 최치원 편도 다시보기로 보면 좋음.

(http://www.kbs.co.kr/1tv/sisa/historyspecial/view/vod/1991781_3088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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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부장 ibuzang

경주시 보문동과 구황동배반동에 걸쳐 있으며 사적 제163호로 지정되어 있다낭산은 동서의 폭이 좁고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산이다이곳은 옛날 신라인들에게 신유림(神遊林)이라 하여 신령스러운 산으로 높이 받들어 우러름을 받았던 곳이다.신라시대에는 3(三祠 나라에서 지내는 세 가지 큰 제사로 대사중사소사가 있다가운데 대사(大祠)를 받들던 중악으로서라벌의 진산(鎭山 도읍지나 각 고을에서 그곳을 보호해 주는 산으로 정하여 제사하던 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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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뜰에서 바라본 낭산
(사적 1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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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능지탑지 (慶州陵只塔址)
(시도기념물 34호)

높이 115,102,100m 달하는 3개의 봉우리를 따라 그 아래 쪽으로 매우 중요한 문화재(유물, 유적)들이 많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진평왕릉, 선덕왕릉, 그리고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 등의 신라왕들의 무덤과 사천왕사, 망덕사, 황복사, 중생사 등의 절터가 있는데 모두 나라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곳이며, 왕실의 복을 빌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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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선덕여왕릉 (新羅善德女王陵)
(사적 1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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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산마애삼존불 (狼山磨崖三尊佛)
(보물 665호)

낭산은 신라왕실에서 중요하게 여긴 곳으로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3, 실성이사금 편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낭산에서 구름이 떠올라 바라보니 마치 누각과 같고, 향기가 짙게 퍼지며 오랫동안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왕이 말하되, “이는 반드시 신령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고 있는 것이니, 아마 이 땅이 복스러운 곳일 것이라하여, 이후부터 사람들이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다.

신라의 대학자인 최치원이 공부를 하던 독서당이 남아 있으며, 신라의 대작곡가이며 연주가인 백결선생도 낭산 아래에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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