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박물관(관장 유병하) 525()부터 92()까지 특별전 황룡사를 개최한다.

 


6백점 유물을 한눈에 보는 최초·최대의 황룡사 특별전

이번 전시는 황룡사찰주본기(보물 제1870) 4만여 점 출토 문화재 가운데 엄선된 6백여 점을 한 자리에 모아 선보이는데, ‘황룡사를 주제로 한 최초의 특별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신라의 3대 보물 가운데 구층 목탑과 장육존상 2개를 보유하고 있던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이었다. 황룡사지는 1968년부터 1973년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뤄진 바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황룡사실을 상설 운영하면서 종래 1백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이번 특별전에서는 새롭게 5백여 점을 더하여 황룡사의 전모를 가늠할 수 있는 6백여 점의 유물을 선보인다. 아울러, 지난 30여 년간 축적된 연구 성과를 토대로 출토 유물을 새롭게 해석하고 조명하는 명실상부 최초·최대의 황룡사 특별전이라 할 수 있다.

 

황룡사를 황룡·목탑·장육존상·가람의 일상으로 나눠 전시

전시는 1-궁궐에 나타난 황룡, 2-호국의 상징, 구층 목탑, 3-신비의 상징, 장육존상, 4-가람의 일상으로 구성하였다.

 

사리기 외함 최초 공개

‘1-궁궐에 나타난 황룡에서는 황룡이 세상의 중심이자 최고를 의미했다는 점, 황룡사가 왕경 전체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건설되었으며, 신라 사찰의 정점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2-호국의 상징, 구층 목탑에서는 보물 제1870호 찰주본기와 함께 심초석 출토 사리장치와 주변 수습 공양물 등 구층 목탑 관련 유물들을 전시한다. 도굴 당했다가 회수된 심초석 사리 봉안 장치를 소개하며, 신장상이 그려진 외함 벽면은 1984년 발간된 보고서에 화질이 좋지 않은 흑백사진이 수록되었을 뿐, 컬러사진도 공개된 적이 없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2면을 공개한다.

 

Canon | Canon EOS 5D Mark IV

사리기(사진 : 국립경주박물관)

사리공양물(사진 : 국립경주박물관)


4m의 장육존상, 신라최대의 종이었던 황룡사종

‘3-신비의 상징, 장육존상에서는 출토 불상 및 금당 출토품을 전시한다. 몽골이 침입하여 불태워버린 후 사라진 주존불인 장육존상은 그 높이가 3.79m나 되는 대형불상이었으며, 종각에 걸어졌던 황룡사종은 4.14m로 성덕대왕신종보다 더 컸음을 실물크기 평면구조물을 통해 보여준다. 중금당 주존불인 장육존상의 머리 일부, 동금당 주존불로 추정되는 소조불상의 손가락을 전시함으로써 신라 3대 보물의 하나였던 장육존상을 더듬어 본다.

 

급할 때 쓰던 미니변기, 30cm에 달하는 대형 경첩 등 황룡사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다

‘4-가람의 일상에서는 국내 최대의 황룡사 망새와 함께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1만 여점의 기와 중 종류와 형식별로 1백여 점을 선별하여 웅장했던 사찰건축을 살펴보고, 아울러 토기와 자기, 금속품 등을 통해 사찰의 일상을 유추해본다.

토기에도 브랜드가 있었고, 급한 볼일을 보는 데 쓰기 위해 휴대용 소변기의 미니어처, 사찰의 밤을 밝히던 등잔, 당대 세속의 물품에 비해서는 소박했던 도자기는 황룡사 사람들의 일상을 이야기해준다.

높이 85cm나 되는 대형 항아리와 30cm 길이에 달하는 대형 쇠못과 대형 경첩, 182cm나 되는 망새와 화려한 장식의 녹유전돌, 다양한 문양의 수막새는 국가사찰 황룡사의 위용을 보여준다.

 

각계 학자들의 자문과 고증에 입각한 전시

전시에 앞서 총 3회에 걸쳐 주보돈(전 경북대 교수)을 비롯하여 역사·미술·고고 및 건축 등 관련학계의 전문학자 7인의 자문을 통해 고증을 강화하였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연구실의 황룡사 건축 연구 성과 등을 비롯하여 각계의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전시를 구성하였다.

 

컴퓨터그래픽(CG)으로 구층 목탑을 고증·재현

이밖에도 CG를 통해 구현한 구층 목탑과 금당 내부의 옛 모습을 복원해 영상물로 보여준다. 황룡사역사문화전시관 제작 CG를 바탕으로 하고 수원대학교 양정석 교수팀이 고증·제작하였다. 또 하늘에서 넓게 내려다 본 황룡사지의 모습을 담은 드론 동영상을 대형 고화질 장비로 상영한다.

 

관람객을 위한 전시 설명회 매주 개최

또한,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매주 목요일 오후에 담당 큐레이터의 전시설명회를 개최한다.

 

전 시 명: 황룡사

전시기간: 2018525()~92()

전시장소: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

전시설명회: 매주 목요일 14:00~15:00(공휴일 제외)

전시품: 보물 제1870호 황룡사찰주본기, 망새, ‘중화3명 사리기 등 473685


※ 보도자료 : 국립경주박물관(http://gyeongju.museum.go.kr/k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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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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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부장 ibuzang

경주의 고려시대를 집중 조명하는 최초의 전시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유병하)은 2016년 7월 12일(화)부터 9월 4일(일)까지 특별전 “고려시대의 경주”를 개최한다. 신라의 천년왕도로 주목받는 경주의 고려시대를 조망하는 첫 전시이다.

   


도시경관과 지역사회를 키워드로 풀어가는 고려 오백년 경주의 역사

“경주”라는 이름은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번 전시는 신라가 멸망한 935년부터 1392년까지 고려시대 경주 지역 사회의 변화와 지역민들의 삶을 ‘도시경관’과 ‘지역사회’라는 키워드로 풀어냈다. 불국사 석가탑 중수기(국보 126호) 등 국보 3점, 보물 15점을 비롯해 모두 500여점의 문화재를 【프롤로그:경주의 탄생, 1부 읍성과 지역사회 운영, 2부 호국의 상징 황룡사, 3부 지역사회와 불교사원, 4부 동족사회와 무덤, 5부 경주사람들, 에필로그:고려의 동경 경주】라는 주제로 구성하였다. 

프롤로그에서는 경순왕의 고려 귀순으로 경주가 신라 왕경에서 고려의 지역도시로 재편되는 과정을 다룬다. 



1부 ‘읍성과 지역사회 운영’에서는 고려시대 경주의 행정 중심이 된 읍성과 지역사회 운영의 모습을 전시한다. 성벽 축조에 사용된 신라 건축물의 석재들과 고려 기와들,「동경 굴석사(東京屈石寺)」가 새겨진 굴불사 출토 쇠북은 1183년 경주의 전 호장 이백유(李伯兪)와 승려 도인(道人)이 제작에 참여하였고 경주를 동경으로 칭했음을 보여준다. 각종 선생안(先生案)과 호장(戶長) 관련 전적은 호장과 부윤(府尹)의 면면을 보여 주는 중요한 전시품이다. 1182년에 세워진 효자 손시양 정려비(보물 제68호)의 입체탁본은 경주가 효행의 도시였음을 보여준다.    



2부‘호국의 상징 황룡사에서는 신라의 중심 사찰이었던 황룡사가 고려시대도 경주민의 정신적 중심으로서 여전히 호국의 상징이었음을 새롭게 조명한다. 각종 대형 기와들과 청자 등 고려시대 황룡사 출토품들은 웅장했던 당시의 모습을 짐작케 해 준다.


    

3부 ‘지역사회와 불교사원’은 경주의 불교사원이 종교 뿐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불국사 성보박물관 부지 출토 명문기와에서 고려시대 불국사가 숙박시설을 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시대 문집자료에서는 분황사가 사람들의 휴식 공간이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불국사 석가탑 중수문서(국보 제126호)에서는 지역 사회가 하나되어 천재지변을 극복한 모습을, 감은사 쇠북에서는 왜구의 침입을 극복했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불국사 석가탑 중수기(국보 126호), 왕실이 발원한 대반야바라밀다경 권210(보물 959­1­1호) 등 10여점의 국보․보물이 전시된다.  



4부 ‘동족사회와 무덤’에서는 경주의 고려시대 무덤군을 통해 동족집단의 무덤을 살펴본다. 물천리·화천리·검단리 등 대규모 무덤군에서 일괄로 출토된 청동 그릇과 거울, 수저, 청자 등 규범화된 부장품들이 밀도있게 소개된다. 도읍인 개경에서 발견된 것과 거의 유사한 경주 구정동 출토 쌍용구름무늬띠거울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대접접시 등 청자제품과 같은 실생활 용기를 부장하였다.



5부 ‘경주사람들’에서는 이제현(李齊賢)·김부식(金富軾)·이의민(李義旼) 등 경주와 관련된 인물들을 소개한다. 초상화, 문집, 비문 등으로 그들의 모습과 행적, 그리고 시대적 상황을 되짚어 볼 수 있다. 또한 고려귀족을 상징하는 묘지명으로 귀족사회에 진입한 경주출신 인물들을 소개하였다.      



신발견 고려시대 구결, 임진왜란 이전 기록된 경주 호장 관련 기록 최초 공개  

기림사 소장 자비도량참법에서 13세기 고려시대 구결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처음 공개한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우리말과 어순이 다른 한문을 읽을 때 토씨를 달아 우리말로 읽었다. 종래 고려 언어 생활을 알 수 있는 이같이 귀중한 자료는 인왕경 등 5건에 불과했다. 

임진왜란 이전에 작성된 유일한 호장안인『부사선생안(府司先生案)』도 처음 공개된다. 이것은 경주부 역대 호장(戶長)의 명단인데, 호장은 향리의 우두머리로서 지방사회의 지배자였다. 1523년 처음 작성된 부사 선생안은 고려시대부터 1787년 신안(新案)을 작성하기까지 호장의 이름과 생년, 본관 등을 기록하였다. 



최신 발굴자료, 경주 읍성 출토품과 구정동 출토 쌍용무늬청동거울 첫 공개

최근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경주 읍성 및 구정동 고려무덤 출토품이 이번 전시에서 공개된다. 고려시대 경주 읍성 축조에는 옛 신라 궁궐 등 기존 건축물을 해체하여 얻은 석재들이 재활용되었다. 이 중 테두리에 안상(眼象)을 새겨 화면 틀처럼 삼고 가운데에 인물처럼 생긴 상을 조각한 통일신라기 부조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상은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北魏, 386~534) 말부터 동위(東魏, 534~550)를 거쳐 북제(北齊, 550~577)에 이르는 6세기 불교미술에서 불비상(佛碑像)의 하단에 새겨진 풍신왕(風神王)과 유사하다. 또한 서쪽 돈황 막고굴 중에서 서위(西魏, 535~556) 때 지어진 제285굴과 당(唐, 618~907) 초기인 7세기의 제329굴 천정 벽화에도 두 손으로 천을 쥐고 뛰는 역동적인 자세의 풍신(風神)이 그려져 있어 이와 비교된다. 경북대학교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울산 출토 9세기 작 사암제 비로자나불좌상의 대좌 중대석에 이와 비슷한 신장상이 새겨져 있으나, 신라에서는 이 소재 자체가 흔치 않아 앞으로의 연구가 기대되는 신자료이다. 

이와 함께 최근 출토된 경주 구정동 쌍용무늬구름무늬띠거울(雙龍文雲文帶鏡)은 고려의 도읍인 개성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거울에는 포장재로 사용된 대나무가 그대로 남아 있다.  


다양한 영상과 충실한 역사 자료 제공   

이 밖에 효자의 마을로 선양한 황남동 소재 손시양 효행정려비 일명 효자리비(孝子里碑, 보물 68호)의 입체탁본, 고려시대 경주 역사를 집성한 역사 연표와 지도, 영상과 삽화가 전시 이해를 돕는다. 무료 관람으로 9월 4일까지 이어진다.      


이 자료에 대하여 더욱 자세한 내용을 원하시면 문화체육관광부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 학예연구사 이용현(☎ 054-740-7535)에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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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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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24대 진흥왕의 능이다. 외부모습은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원형봉토분으로 아래쪽에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무덤을 보호하는 둘레돌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나 지금은 몇 개밖에 보이지 않는다.
삼국통일 이전 신라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의 능으로서는 규모가 아주 작은 편에 속한다.『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법흥왕과 같은 위치에 있어야 하는데 반대방향으로 2㎞ 떨어져 있다. 때문에 서악동에 있는 서악리고분 4기 가운데 아래에서 세 번째 무덤을 진흥왕릉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진흥왕은 신라 제24대 왕(재위 540∼576)으로 성은 김씨, 이름은 삼맥종 또는 심맥부이다. 지증마립간의 손자로, 법흥왕의 아우 입종갈문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씨이며, 왕비는 박씨로 사도부인이다.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왕태후 김씨(법흥왕비)가 섭정(군주국가에서 새로 즉위한 왕이 어리거나 국가가 어려울 때, 왕 대신 국정을 처리하던 일이나 사람을 일컫던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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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흥왕릉(新羅眞興王陵)
사적 1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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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악동고분군(사적 142호)
(태종무열왕릉 뒷편에 있는 4기의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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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산에서 바라 본 서악동고분군(사적 142호)

551년(진흥왕 12)에 "개국(開國)"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직접 통치를 시작하면서부터 영토확장을 위한 적극적인 대외정복사업을 벌여 나갔다.

550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지금의 충청남도 천안 또는 증평)과 금현성(지금의 충청남도 전의)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틈을 타 이듬해 병부령 이사부(신라의 장군이자 정치가, 내물마립간의 4대손으로 지증마립간 때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정복함)로 하여금 두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이것을 기반으로 백제 제26대 성왕(523~554)과 연합해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공격하여 백제가 한강 하류 지역을 되찾도록 도왔다.


진흥왕은 거칠부(신라의 장군이자 재상, 내물마립간의 5대손, 진지왕 때 벼슬이 상대등에 이름)와 8명의 장군에게 명하여 한강 상류유역인 죽령 이북 고현(지금의 철령) 남쪽의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았으며, 553년에는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를 기습 공격해 한강하류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 전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 신주를 설치하고, 아찬(17관등 중 6번째로 아척간이라고도 함) 김무력을 초대 군주(신라시대의 지방 관직. 지방 행정 구역인 주(州)의 장관이다. 지증마립간 때 처음으로 신설됨)로 임명하였다.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유역을 빼앗으면서 백제와 맺은 나제동맹이 깨지게 되는데 백제 성왕은 554년 대가야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전투에서 오히려 신주 군주 김무력의 부하인 삼년산군(지금의 충청북도 보은)출신의 도도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며서 백제군은 거의 전멸하였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인적·물적 자원의 획득 외에도 황해를 통한 중국과 직접 외교를 할 수 있는 교통로를 확보하였다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법흥왕의 가야에 대한 정복사업을 이어 받아 낙동강유역에까지 진출하기 시작하여 555년에는 비사벌(지금의 경상남도 창녕)에 완산주가 설치되었다. 이것을 통해 이전의 어느 시기에 아라가야(지금의 경상남도 함안)비화가야(지금의 경상남도 창녕)지방이 신라에 의하여 점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와 연합했던 대가야는 사실상 신라의 영향력 아래 있었는데  562년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대가야는 신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사부와 그의 부장 사다함이 무력으로 정복하여 멸망시켰다. 이후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고 낙동강유역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밖에도 동북쪽으로 북상해 556년에 비열홀주(지금의 함경남도 안변)를 설치하고 이곳을 근거로 하여 568년 이전 어느 시기에는 함흥평야까지 진출한 듯하다. 이와 같은 고구려·백제·가야에 대한 활발한 정복을 통해 신라는 삼국통일 이전에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현재 전하고 있는 창녕척경비(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북한산순수비(서울시 종로구)·황초령비(함경남도 함주군 하기천면과 장진군 신남면 사이에 있는 고개)·마운령비(함경남도 이원군 동면과 단천군 부귀면 사이에 있는 고개)등 4개의 순수관경비(진흥왕순수비)와 단양적성비(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하방리)가 진흥왕의 영토 확장에 대한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다. 4개의 순수비 중 북한산에 세워져 있는 북한산비는 세워진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진흥왕의 순수관경비는 새로이 신라 땅이 된 지역 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확장된 영토를 확인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진흥왕은 국내 정치에 있어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545년 이찬(17관등 중 2번째로 이척찬이라고도 함)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아찬(17관등 중 5번째) 거칠부로 하여금『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또한 법흥왕에 의해 공인된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여 544년에 흥륜사를 완성하고, 553년에는 월성 동쪽에 왕궁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나자 왕궁을 고쳐서 절로 삼고 566년에 황룡사를 완공하였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로서 이곳에는 574년에 신라 최대의 불상인 장륙존상이 만들어져 모셔졌다.

이와 같이 진흥왕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누구에게나 제 집을 떠나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고, 그 자신도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법호를 법운이라 하여 여생을 마쳤다. 왕비도 이를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거처하다가 614(진평왕 36)에 죽었다.

진흥왕의 많은 업적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화랑도인데, 576년에 여성이 우두머리로 있는 원화를 없애고 남성을 우두머리로 한 화랑도를 만들었다. 기록상으로는 576년에 화랑도가 만들어진 듯하지만, 실제로는 진흥왕 초기에 이미 화랑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562년 대가야 정벌에 큰 전공을 세운 사다함이 유명한 화랑이었다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진흥왕이 원화를 없애게 된 이유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원화를 받들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임금이나 신하가 모두 사람을 알 수 없음을 고민한 나머지 끼리끼리 떼지어 놀게 하고 그 속에서 행동을 관찰하여 뽑아 쓸 셈으로 미녀 남모와 준정 두 사람을 간택하여 그녀들을 중심으로 무리 300여 명을 모이게 하였다. 남모와 준정이 서로 경쟁하고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꾀어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강물에 던져 죽여 버렸다. 이로 인하여 준정도 사형에 처하게 되니 무리들이 화목을 상실하여 원화제도를 없앴다._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진흥왕 37년

『삼국유사』에는 풍월도 즉 화랑의 우두머리가 국선이라는 것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여러 해 뒤에 왕이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먼저 풍월도를 숭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명령을 내려 양가의 남자 가운데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원화라는 이름을 고쳐 화랑이라고 했다. 처음으로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을 삼았으니, 이가 바로 화랑 국선의 시초이다.

김대문의『화랑세기』에는 "어진 재상과 충신들이 화랑에서 나왔고 뛰어난 장수와 용맹한 군사들이 모두 여기서 나왔다"고 했으며, 신라 말기의 뛰어난 학자였던 최지원의『난랑비서』에 "나라의 현묘한 도가 있으니 그 이름이 풍류도인데 그 핵심이 유불선(유교, 불교, 도교) 3교를 포함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진흥왕은 대내외적으로 수많은 업적을 남긴 신라 중흥의 군주였다
.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주의식의 상징적 표현이었던 독자적 연호를 3개나 사용할 수 있었다. 551년의 개국, 568년의 대창(大昌), 572년의 홍제(鴻濟)가 그것이다. 재위 37년만인 57643세로 죽자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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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낭산 정상에 있는 선덕여왕의 무덤이다. 외부 모습은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2~3단으로 둘레돌(무덤의 가장자리 기슭에 돌아가면서 늘어놓은 돌로 무덤의 흙이 무너져 내리 것을 막는 역할을 함)을 쌓고 다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무덤이다.

선덕여왕은 신라 제27대 왕(632647)으로 성은 김씨, 이름은 덕만이다. 진평왕의 큰 딸로 어머니는 마야부인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 : 성스러운 여자 황제)”란 호를 올렸다. 신라에서 여자인 선덕여왕이 처음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성골이라는 특수한 왕족 신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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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선덕여왕릉(新羅善德女王陵)
사적 182호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미리 알아서 맞춘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첫 번째는 공주로 있을 때 당 태종이 보내온 모란꽃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향기가 없는 꽃임을 알아맞힌 것으로 『삼국사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평왕 때에 당나라에서 얻어 온 모란꽃 그림과 그 씨앗을 덕만에게 보였더니 "이 꽃은 아름답긴 하나 향기가 없습니다" 하였다. 왕은 웃으며 "네게 어떻게 아느나?" 하니 "이 꽃은 뛰어나게 곱지만 그림에 나비와 벌이 없으니 이는 반드시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 하였다. 그 씨앗을 심어보니 과연 덕만의 말과 같았다.

두 번째는 여근곡(경주시 건천읍 부산 골짜기)에 백제군이 몰래 잠입한 것을 미리 알고 군사를 보내 소탕한 일이다.
『삼국사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선덕여왕 5년(636), 여름 5월에 개구리 떼가 대궐 서쪽 옥문지에 모여드니 왕이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개구리의 불거진 눈은 병사들의 모습이다. 내 일찍이 들으니 서남 변방에도 옥문곡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혹 백제군이 몰래 그곳에 들어 왔는지 알 수 없다"하고 장군 알천을 시켜 가서 수색케 하였더니 백제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려고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그 곳에 숨어 있으므로 알천이 들이쳐 다 잡아 베었다.


세 번째는 자신이 죽는 날을 미리 알아맞힌 것이다.삼국유사』에 선덕여왕이 죽기 전에 남긴 유언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왕이 아무 병이 없을 때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죽을 것인데 나를 도리천에 묻어 달라.”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해 다시 물으니, 왕은 낭산 남쪽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과연 그날이 되자 왕이 죽었고, 신하들은 낭산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왕이 낭산 아래에 사천왕사를 세우자 비로소 사람들은 그 뜻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도리천이란 하늘은 사천왕이 다스리는 사왕천이란 하늘 위에 있는 것인데, 낭산 아래 세워진 사천왕사가 사왕천이란 하늘이고 바로 위 왕의 무덤이 있는 낭산 정산이 바로 도리천이란 하늘이기 때문이다.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16년 동안 신라를 다스린 선덕여왕은 분황사와 영묘사를 비롯하여 천문관측대인 첨성대를 세웠다. 그리고 끊임없이 신라를 괴롭히는 백제와 고구려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선덕여왕 말년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의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의 조카인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이 이를 막아냈지만 선덕여왕은 이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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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의 능으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아래쪽 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무덤의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 쌓은 돌)을 둘렀는데지금은 몇 개만 남아 있다.

진평왕의 성은 김씨이며이름은 백정이다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이며왕비는 마야부인이다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신기하고 키가 크고똑똑했다고 한다작은 아버지인 진지왕이 화백회의(신라 때에,진골 이상의 귀족들이 나라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던 회의 제도로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찬성해야 중요한 내용이 통과되는 만장일치제임)에 의해 왕에서 쫓겨나자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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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평왕릉(新羅眞平王陵)
사적 180호

진평왕은 56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왕권을 굳게 세우기 위해 새로운 중앙 행정부서들을 만들었다. 관리들의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 배를 관리하는 선부서, 나라의 세금을 관리하는 조부, 수레나 가마를 관리하는 승부, 문화와 교육 및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영객부 등을 만들었다.

진평왕은 건복(建福)”이라는 독자적인 연호(군주국가에서 왕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던 기간 동안 사용하던 칭호, 중국에서 시작됨)를 사용하였으며, 중국에서 발달한 불교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원광법사를 비롯한 많은 승려들을 유학 보냈다.

이때는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많은 침입을 받았는데, 중국의 수,당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어 두 나라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삼국유사』제2 기이, 천사옥대(하늘이 옥띠를 내리다)편을 보면 진평왕의  특이한 외모와 하늘이 내려 준 옥으로 만든 허리띠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전하고 있다.

…내제석궁(왕이 창건한 천주사라는 절)에 거둥하면서 돌다리를 밟자 돌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어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보이라."…(중략)…즉위 원년에 천사가 대전 뜰에 내려와 왕에게 말했다. "옥황상제께서 내게 명해 이 옥띠(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전해드리게 하셨습니다." 왕이 친히 꿇어앉아 받은 뒤에 사자는 하늘로 올라갔다. 큰 제사 때에는 왕이 반드시 이 띠를 둘렀다

신라에는 세 가지 진기한 보물이 전해져 내려 오는데, 진평대왕의 천사옥대와 황룡사의 장륙존상, 그리고 황룡사의 9층목탑이다. 이것들로 인해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신라를 침범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때 진평대왕의 천사옥대를 태조(왕건)에게 받쳤다고 하며, 황룡사의 장륙존상과 9층목탑은 몽골의 침입 때 불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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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황룡사 복원 위한 포럼개최
오는 28일(화) 오후 1시부터 29일까지 - 황룡사 복원 위한 연구 성과 발표와 향후 과제 논의 
경주시와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오는 2월 28일부터 29일까지 양일간 보문단지 내 드림센터에서 황룡사복원사업에 대한 그동안의 기초연구성과를 공개하고 향후 추진계획과 정비활용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황룡사복원 기초연구 포럼을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지난 2006년부터 진행한 각 분야의 연구 성과들을 종합하여 황룡사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앞으로 진행될 심화연구와 단계별 복원계획을 논의하는 자리로, 경주시민을 비롯한 관련 단체와 학계, 연구관계자들이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황룡사 복원 조감도_사진출처(경주시 홈페이지)

포럼의 주제는 ‘황룡사 기반연구 ‘복원고증연구 ‘정비 및 활용 ‘종합계획으로 정하고 먼저 ‘황룡사건립의 정치ㆍ사회적 배경에 대하여 조인성교수(경희대학교 역사학)의 발표를 시작으로 모두 9명의 발표와 토론이 이어지며, 이와 함께 종합토론에서는 김봉건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총장의 진행으로 발표자와 토론자, 패널들이 참여하는 질의와 토론을 벌일 계획이다. 
이에 따라 경주시는 2006년 ‘황룡사 국제학술대회, 2008년 ‘황룡사 복원연구의 현황과 과제 심포지엄에서는 총론적인 관점에서 기초연구에 대해 논의했다면 이번 포럼에서는 구체적인 복원계획과 활용 방향을 주제로 포럼을 진행할 예정이어서 관계전문가와 시민들의 여러 의견을 수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편,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짓기 시작하여 17년만에 완성하고, 선덕여왕 14년(645)에는 구층목탑이 완공된 신라 최고의 호국사찰로 지난 1976년에 시작된 발굴조사로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이후 학계나 일반인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아 왔으며, 최근 경주시 역사도시조성사업의 대표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황룡사복원에 대하여 관련학계와 국민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포럼의 자세한 내용에 대한 문의나 참여는 경주시 역사도시과(054-779-6144)나 경주시 홈페이지(www.gyeongju.go.kr)를 방문하시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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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보덕동 | 드림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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