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24대 진흥왕의 능이다. 외부모습은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원형봉토분으로 아래쪽에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무덤을 보호하는 둘레돌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나 지금은 몇 개밖에 보이지 않는다.
삼국통일 이전 신라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의 능으로서는 규모가 아주 작은 편에 속한다.『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법흥왕과 같은 위치에 있어야 하는데 반대방향으로 2㎞ 떨어져 있다. 때문에 서악동에 있는 서악리고분 4기 가운데 아래에서 세 번째 무덤을 진흥왕릉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진흥왕은 신라 제24대 왕(재위 540∼576)으로 성은 김씨, 이름은 삼맥종 또는 심맥부이다. 지증마립간의 손자로, 법흥왕의 아우 입종갈문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씨이며, 왕비는 박씨로 사도부인이다.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왕태후 김씨(법흥왕비)가 섭정(군주국가에서 새로 즉위한 왕이 어리거나 국가가 어려울 때, 왕 대신 국정을 처리하던 일이나 사람을 일컫던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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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흥왕릉(新羅眞興王陵)
사적 1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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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악동고분군(사적 142호)
(태종무열왕릉 뒷편에 있는 4기의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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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산에서 바라 본 서악동고분군(사적 142호)

551년(진흥왕 12)에 "개국(開國)"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직접 통치를 시작하면서부터 영토확장을 위한 적극적인 대외정복사업을 벌여 나갔다.

550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지금의 충청남도 천안 또는 증평)과 금현성(지금의 충청남도 전의)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틈을 타 이듬해 병부령 이사부(신라의 장군이자 정치가, 내물마립간의 4대손으로 지증마립간 때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정복함)로 하여금 두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이것을 기반으로 백제 제26대 성왕(523~554)과 연합해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공격하여 백제가 한강 하류 지역을 되찾도록 도왔다.


진흥왕은 거칠부(신라의 장군이자 재상, 내물마립간의 5대손, 진지왕 때 벼슬이 상대등에 이름)와 8명의 장군에게 명하여 한강 상류유역인 죽령 이북 고현(지금의 철령) 남쪽의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았으며, 553년에는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를 기습 공격해 한강하류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 전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 신주를 설치하고, 아찬(17관등 중 6번째로 아척간이라고도 함) 김무력을 초대 군주(신라시대의 지방 관직. 지방 행정 구역인 주(州)의 장관이다. 지증마립간 때 처음으로 신설됨)로 임명하였다.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유역을 빼앗으면서 백제와 맺은 나제동맹이 깨지게 되는데 백제 성왕은 554년 대가야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전투에서 오히려 신주 군주 김무력의 부하인 삼년산군(지금의 충청북도 보은)출신의 도도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며서 백제군은 거의 전멸하였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인적·물적 자원의 획득 외에도 황해를 통한 중국과 직접 외교를 할 수 있는 교통로를 확보하였다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법흥왕의 가야에 대한 정복사업을 이어 받아 낙동강유역에까지 진출하기 시작하여 555년에는 비사벌(지금의 경상남도 창녕)에 완산주가 설치되었다. 이것을 통해 이전의 어느 시기에 아라가야(지금의 경상남도 함안)비화가야(지금의 경상남도 창녕)지방이 신라에 의하여 점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와 연합했던 대가야는 사실상 신라의 영향력 아래 있었는데  562년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대가야는 신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사부와 그의 부장 사다함이 무력으로 정복하여 멸망시켰다. 이후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고 낙동강유역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밖에도 동북쪽으로 북상해 556년에 비열홀주(지금의 함경남도 안변)를 설치하고 이곳을 근거로 하여 568년 이전 어느 시기에는 함흥평야까지 진출한 듯하다. 이와 같은 고구려·백제·가야에 대한 활발한 정복을 통해 신라는 삼국통일 이전에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현재 전하고 있는 창녕척경비(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북한산순수비(서울시 종로구)·황초령비(함경남도 함주군 하기천면과 장진군 신남면 사이에 있는 고개)·마운령비(함경남도 이원군 동면과 단천군 부귀면 사이에 있는 고개)등 4개의 순수관경비(진흥왕순수비)와 단양적성비(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하방리)가 진흥왕의 영토 확장에 대한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다. 4개의 순수비 중 북한산에 세워져 있는 북한산비는 세워진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진흥왕의 순수관경비는 새로이 신라 땅이 된 지역 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확장된 영토를 확인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진흥왕은 국내 정치에 있어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545년 이찬(17관등 중 2번째로 이척찬이라고도 함)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아찬(17관등 중 5번째) 거칠부로 하여금『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또한 법흥왕에 의해 공인된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여 544년에 흥륜사를 완성하고, 553년에는 월성 동쪽에 왕궁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나자 왕궁을 고쳐서 절로 삼고 566년에 황룡사를 완공하였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로서 이곳에는 574년에 신라 최대의 불상인 장륙존상이 만들어져 모셔졌다.

이와 같이 진흥왕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누구에게나 제 집을 떠나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고, 그 자신도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법호를 법운이라 하여 여생을 마쳤다. 왕비도 이를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거처하다가 614(진평왕 36)에 죽었다.

진흥왕의 많은 업적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화랑도인데, 576년에 여성이 우두머리로 있는 원화를 없애고 남성을 우두머리로 한 화랑도를 만들었다. 기록상으로는 576년에 화랑도가 만들어진 듯하지만, 실제로는 진흥왕 초기에 이미 화랑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562년 대가야 정벌에 큰 전공을 세운 사다함이 유명한 화랑이었다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진흥왕이 원화를 없애게 된 이유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원화를 받들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임금이나 신하가 모두 사람을 알 수 없음을 고민한 나머지 끼리끼리 떼지어 놀게 하고 그 속에서 행동을 관찰하여 뽑아 쓸 셈으로 미녀 남모와 준정 두 사람을 간택하여 그녀들을 중심으로 무리 300여 명을 모이게 하였다. 남모와 준정이 서로 경쟁하고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꾀어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강물에 던져 죽여 버렸다. 이로 인하여 준정도 사형에 처하게 되니 무리들이 화목을 상실하여 원화제도를 없앴다._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진흥왕 37년

『삼국유사』에는 풍월도 즉 화랑의 우두머리가 국선이라는 것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여러 해 뒤에 왕이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먼저 풍월도를 숭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명령을 내려 양가의 남자 가운데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원화라는 이름을 고쳐 화랑이라고 했다. 처음으로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을 삼았으니, 이가 바로 화랑 국선의 시초이다.

김대문의『화랑세기』에는 "어진 재상과 충신들이 화랑에서 나왔고 뛰어난 장수와 용맹한 군사들이 모두 여기서 나왔다"고 했으며, 신라 말기의 뛰어난 학자였던 최지원의『난랑비서』에 "나라의 현묘한 도가 있으니 그 이름이 풍류도인데 그 핵심이 유불선(유교, 불교, 도교) 3교를 포함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진흥왕은 대내외적으로 수많은 업적을 남긴 신라 중흥의 군주였다
.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주의식의 상징적 표현이었던 독자적 연호를 3개나 사용할 수 있었다. 551년의 개국, 568년의 대창(大昌), 572년의 홍제(鴻濟)가 그것이다. 재위 37년만인 57643세로 죽자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

Posted by 이부장 ibuzang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 얼굴무늬수막새: 수증 40주년 기념특집진열을 개최합니다. 이번 전시는 1016일부터 1125일까지 미술관 2에서 열립니다.

신라의 미소로도 잘 알려져 있는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얼굴무늬수막새는 경주를 나타내는 상징물입니다. 이 수막새는 원래 일제강점기였던 1934, 경주의 한 고물상에서 당시 경주에 살던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라는 일본인 의사가 구입했던 것입니다. 이 수막새는 1944년 다나카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 갖고 갔으나, 경주박물관 박일훈 관장의 노력 끝에 197210월 다나카가 직접 박물관에 찾아와 기증하므로써 고국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올해는 얼굴무늬수막새가 우리 곁에 돌아온 지 꼭 40돌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기증자인 다나카씨의 고마운 뜻을 기리면서, 얼굴무늬수막새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얼굴무늬수막새(人面文圓瓦當), 신라 7세기, 전 경주시 사정동(추정 영묘사 터) 출토, 길이 11.5cm, 국립경주박물관

얼굴무늬수막새(人面文圓瓦當), 통일신라, 출토지 미상, 길이 15.1cm, 국립경주박물관

얼굴무늬사래기와(人面文望板瓦), 통일신라, 출토지 미상, 높이 17.4cm, 국립경주박물관

얼굴무늬기와편(人面文瓦片), 통일신라, 대구 부인사 터 출토, 높이 8.8cm, 국립경주박물관

얼굴무늬토기(人面文土器), 통일신라, 월지(구 안압지) 출토, 입지름 9.8cm, 국립경주박물관


이번 전시에서는 삼국시대 제작 당시 얼굴무늬수막새가 있었던 위치를 살펴봅니다. 일제강점기에 발견 장소는 경주읍 사정리(沙正里, 지금의 사정동)였다고 합니다. 이곳은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興輪寺)가 있던 곳으로 한동안 전해왔으나, 근래 들어 영묘사(靈妙寺)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전시품으로는 얼굴무늬수막새를 비롯하여 기와, 토기 등 사람 얼굴무늬가 표현된 신라의 미술품 7점이 선보입니다. 아울러 백제 지역에서 만들어진 얼굴 자료들도 함께 비교해 보았습니다. 고대 미술에서 사람 얼굴을 표현하는 것은 무언가를 바라는 주술적(呪術的, 불행이나 재해를 막으려고 주문을 외거나 술법을 부리는 일)인 목적이나 나쁜 것을 물리쳐달라는 벽사적(辟邪的,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치는 것)인 행위입니다. 신라의 얼굴무늬수막새는 험상궂거나 무서운 표정 대신에 웃음으로써 나쁜 것을 달래서 돌려보낸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얼굴무늬수막새의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미지들을 모아 사진자료로 제시하고, 우리 생활 속에 살아 숨쉬는 전통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모쪼록 이번 전시가 문화재 기증의 큰 뜻과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자료출처 : 국립경주박물관 보도자료(http://gyeongju.museum.go.kr/), 사진-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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